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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렘나의 불안한 시기는 결국 외부의 세력으로 인해 폭발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두 역재라고 부른다. 두 역재란 [[에옐누마의 습격]]과 [[흉내이리의 반란]]을 엮어 부르는 말으로, 이렘나의 본토지역은 이로 인해 초토화가 된다. | 이렘나의 불안한 시기는 결국 외부의 세력으로 인해 폭발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두 역재라고 부른다. 두 역재란 [[에옐누마의 습격]]과 [[흉내이리의 반란]]을 엮어 부르는 말으로, 이렘나의 본토지역은 이로 인해 초토화가 된다. | ||
두 역재로부터 안전했던 지역은 [[실리킬 숲]]과 지형상 연결되지 않은 [[서부 기사단 지방]], [[셰헤카사 제도]]뿐이었는데, 이 지역들 역시 기사들이 차출되어 일정 수준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나, [[셰헤카사 제도]]는 이 시기 직접적인 전화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5%에 가까운 인명 손실을 겪었다.<ref>물론, 본토와 네라다 지방이 40% 가까운 인명 피해를 겪었던 것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었다.</ref> | 두 역재로부터 안전했던 지역은 [[실리킬 숲]]과 지형상 연결되지 않은 [[서부 기사단 지방]], [[셰헤카사 제도]]뿐이었는데, 이 지역들 역시 기사들이 차출되어 일정 수준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나, [[셰헤카사 제도]]는 이 시기 직접적인 전화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5%에 가까운 인명 손실을 겪었다.<ref>물론, 본토와 네라다 지방이 40% 가까운 인명 피해를 겪었던 것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었다.</ref><ref>셰헤카사 제도는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짓거리에 책임을 져야 했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하였다.</ref> | ||
==== [[에옐누마의 습격]](5055년~5091년) ==== | ==== [[에옐누마의 습격]](5055년~5091년) ==== |
2023년 1월 15일 (일) 03:26 판
이렘나 철랑대 | 역사 | 지리 및 행정구역 | 문화 | 종교 | 경제 | 외교 | 종족 | 언어 | 생태와 생물군계 | 마법 | 전쟁 | |
---|---|
이렘나 3차 내전 | 셰헤카사 제도 | 네라다 공민공화국 | |
엘레르디 왕국 |
이렘나의 지역별 역사+ | |||||||||||
---|---|---|---|---|---|---|---|---|---|---|---|
연도 | EV[3] | Es[4] | NV[5] | Sh[6] | Nd[7] | Sch[8] | Ld[9] | AS[10] | Hh[11] | ||
- | 바샨니 원시부족 | 아투제르 니레이드 분파 |
쿠로유키 문명[12] | 엘레르디의 새벽 | - | ||||||
1363년 | 엘레르디 왕국 | ||||||||||
2138년 | 북메디아 북부 원주민 | ||||||||||
3109년 | 대파랑 | 대파랑 | |||||||||
3307년 | 레네 분견대 잔존 부대 | 바샨니 원시부족 | 아투제르 니레이드 분파 |
북메디아 북부 원주민 | |||||||
3313년 | 이렘나 파랑 기사단국 | ||||||||||
3472년 | 이렘나 파랑 기사단국 | ||||||||||
3714년 | 이렘나 내전 | ||||||||||
3773년 | 이렘나 세습 기사단국 | ||||||||||
3791년 | 네라다 확장지구 | ||||||||||
3845년 | 셰헤카사 개척지 | ||||||||||
3916년 | 이렘나 기사제후국 | 엘레르디 왕국 | 네라다-셰헤카사 주권연합 | ||||||||
3973년 | 수몰 | 엘레르디 왕국 | |||||||||
4048년 | 이렘나 철랑대 | 레르디에 군정청 | 이렘나 철랑대의 영향권 투사지역 | ||||||||
4610년 | 이렘나 철랑대 | ||||||||||
현재 : 5806년 1월 17일[1](자소크력) 2710년 6월 12일[1](파랑력) |
이렘나 철랑대의 역사를 다룬 문서이다.
대파랑의 종장
자세한 내용은 대파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렘나 기사단국(3313년~3916년)
이렘나 철랑대의 전신이었던 이렘나 기사단국(이렘나어: Enav k'Iremna)은 3313년부터 3916년까지 지속하였으며, 내외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두 시기를 가리켜 이렘나 파랑 기사단국과 이렘나 세습 기사단국으로 나눈다. 이 시기는 이렘나 내전의 종결을 기점으로 나눈다.
이렘나 파랑 기사단국(3313년~3773년)
이렘나 파랑 기사단국은 3773년 이렘나 내전 이전까지의 초기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이렘나 기사단국이 바샨니인을 정복, 흡수하며 현 영토에 자리잡아가는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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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르 반도로의 정착
이렘나 철랑대는 자소크력 3109년부터 시작된 북메디아대륙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기, 대파랑의 종결시기에서 시작된 작은 기사단국이다. 3310년경, 북메디아 대륙의 북부를 휩쓴 파랑 기병대은 내부의 문제로 여러개의 기사단과 선봉대로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레에헤-아르세른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렘나 반도에 정착한 분견대가 현재의 이렘나 철랑대의 모태가 된다.
파랑 기병대의 후신이었던 이들은 파랑 기병대에 피해를 심각하게 입은 다른 나라들의 표적이 되었지만 북메디아 동북부의 엘레르디 왕국의 보호 하에 셰르반도, 곧 현재의 이렘나 반도에 정착할 수 있었다.
3313년 4월 11일, 구 셰르 반도[13]에 이렘나 기사단국이 세워진다. 이후 800년간 이렘나의 역사는 바샨니인들을 정복하고 동화시킨 역사가 된다.[14]
초기 기사단 시기
이렘나인들이 이렘나 기사단국을 이룬 이후, 북메디아 대륙의 고대 요정 왕국인 엘레르디 왕국은 이렘나인의 후견국을 자처하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이렘나 기사단국을 보호하였다. 이때의 문서에는 엘레르디를 구원자이자 계도자라라고 표현한 것이 많다. 그러나, 엘레르디 왕국은 이렘나 기사단국에게 최소한의 간섭만 유지하였다.[15]
네라다 지방과 셰헤카사 제도, 실리킬 숲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국경은 이 시기에 결성되었다.
바샨니 정복 시기(3313년~3472년)
초기 정착 이후 142년동안 계속되던 바샨니 정복기, 이렘나 기사단국은 선주민이었던 바샨니인 공동체 근처에 거주지를 건설하고, 바샨니 공동체들을 흡수하여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원시생활을 하던 바샨니인들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의해 이렘나 기사단국으로 복속되어 이렘나 기사단국의 하위 계급을 차지하게 된다.
규모가 큰 바샨니 공동체는 이에 저항을 하기도 하였고, 몇번의 커다란 전투가 있었으나, 니크비츠 산림의 영원의 요새를 제외하고 3390년 이내로 전부 제압된다.
영원의 요새 정복(3472년)
니크비츠 산림의 영원의 요새는 하늘 협곡의 상부에 있어서 타지역보다 정복이 늦었다. 8000m를 오르는 일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커다란 성채가 협곡의 최상부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타 지역보다 80년 가량이나 늦은 3472년에 정복되게 된다.
13 기사단 시기(3472년~3714년)
바샨니 정복이 종료된 이후, 240년간 이렘나 기사단국은 내부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렘나 철랑대 문화의 근간이 발생하였다. 이렘나의 금속과 철 관련 기술들이 발전하였다.[16]
지역별로 12개의 기사단이 정비되었으며, 각각의 기사단들은 지역 기사단 대표에 의해 반쯤 독립적인 영지처럼 운영이 되었는데[17], 이때의 지역별 독립성에 의해 각 지방의 문화가 이질적으로 분화되었다. 다음은, 12개 기사단의 목록이다.[18]
- 체나냐(이렘나어: î'Velbashai Tzenanya, 엘레르디어: Þelune)[19]
- 아르세른의 방벽(이렘나어: î'Kaban k'Arsern, 엘레르디어: Eril Arsern)
- 녹슨 산맥(이렘나어: î'Nurr re'Batech, 엘레르디어: Kalamanubel)
- 북 레에헤(이렘나어: î'Velbashai re'Env k'Reehe 엘레르디어: Nurem Leiher)
- 니크비츠 삼림(이렘나어: î'Akiy Nikvitz, 바샨니어: Nikviyz Priy, 엘레르디어: Sylinir)
- 사르자니케브 평야(이렘나어: î'Haiys s'Arzanikev, 엘레르디어: Eđel Aseniv)
- 파시헤(이렘나어: î'Velbashai f'Asiche, 엘레르디어: Varđy)[19]
- 메르디의 별자리(이렘나어: î'Illuna k'Merdiy, 엘레르디어: Allune Merdy)
- 즈헤르피니샤카(이렘나어: î'Velbashaa Zcherpiniy-î'Saka, 엘레르디어: Shävnäfi-Sargir)[19]
- 북 크리할니킬(이렘나어: î'Velbashai re'Env k'Richalnikiyl, 엘레르디어: Nure Rielniky)[19]
- 남 크리할니킬(이렘나어: î'Velbashai re'Naal k'Richalnikiyl, 엘레르디어: Diƿen Rielniky)
- 얼음 해안 지역(이렘나어: î'Velbashai k'Ana re'Niyl, 엘레르디어: Bređorn)[19]
12개의 지역 기사단과 본국 기사단을 합쳐 13개의 기사단이 운영되었다고 하여 13 기사단 시기라고 한다.
이렘나 내전(3714년~3773년)
철각의 전투의 결과를 놓고 여러 지역간의 치정적 싸움과 이렘나의 복합적인 사회문제가 얽혀 벌어진 내전이다. 이 내전에서는 이렘나인뿐만 아니라 바샨니인들도 자신만의 기사단국을 만들기도 했다.
이렘나 사회가 떼바술사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건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어난 바샨니인에 대한 인신공양은 이후, 피차별 종족인 바샨니의 분노를 불러와 바샨니 반란의 원인이 된다. 또한, 이때 벌어진 바샨니인 학살에 의해 체나냐 지방과 수몰 이후 체나냐 지방의 유민이 몰려든 아르세른의 방벽, 녹슨 산맥 지역은 바샨니인의 비율이 타 지방에 비해 낮은 편이다.
다음은 이렘나 내전의 파벌 목록이다.
- 남서부 이렘나 연합(3714년~3750년)[20]
- 하스투라페흐 정통기사연합(3714년~3773년)[21]
- 하네브 중립동맹(3714년~3773년)[21]
- 샤카 이렘나 형제 기사단(3714년~3732년)[22]
- 이렘나 파랑 계승연합(3714년~3739년)[23]
- 바시닐 시 방위기사단(3714년~3762년)[24]
- 타나신 동부 철각(3714년~3761년)[25]
- 검은 요새들(3714년~3734년)[26]
- 체나냐의 결속자들(3716년~3731년)[20]
- 크리할니킬 이렘나 공국(3717년~3736년)[27][28]
- 란그라테흐 기사통치구(3718년~3761년)[29]
- 하늘날개 바샨니(3719년~3770년)[30]
- 아르세른 이렘나 기사단(3721년~3755년)[31][30]
- 니다 연합(3722년~3747년)[20]
- 시산브라이 동맹(3722년~3771년)[32]
- 녹슨산맥의 이렘나와 바샨니 방어령(3724년~3745년)[20]
- 니크비츠 바샨니 기사단(3725년~3748년)[30]
- 강철 연합기사단(3727년~3765년)[29]
- 사르자니케브의 동지들(3731년~3769년)[33]
- 즈헤르피니 공화기사정(3733년~3746년)[20]
- 크리할니킬 구국 기사단(3735년~3741년)[34]
- 서부 해안의 고귀한 기사단(3740년~3759년)[25]
- 아투르의 방패(3744년~3755년)[35]
- 레에헤 영구 보호령(3744년~3751년)[20]
- 칸노드라 순수기사연합(3749년~3755년)[29]
- 얼음 해안 전쟁 기사단(3753년~3773년): 내전에서 승리한 파벌
- 다키네흐리의 전쟁인도자들(3759년~3773년)[21]
- 시네도라 파랑 기사단(3757년~3763년)[33]
- 북부 크리할니킬의 숭고한 기사단(3759년~3768년)[35]
- 파시헤 연합(3762년~3771년)[35]
- 셀바파 권위기사단(3766년~3773년)[21]
이렘나 세습 기사단국(3773년~3916년)
이렘나 내전에서 승리한 얼음 해안 전쟁기사단의 라헨차냐[36] 가문은 기사단장의 정통성을 선포하고 이렘나의 기사단을 기끌게 된다. 라헨차냐 가문은 40년이 못되어 암살로 사라졌지만, 이렘나 기사단국은 이후 3916년까지 유력 가문들이 기사단장이 되는 시기를 맞이한다. 이것이 이렘나 세습 기사단국의 발단이다.
바샨니 반란을 전후로 칼의 비 시기와 철의 끝으로 나눈다.
칼의 비 시기(3773년~3824년)
칼의 비 시기의 이렘나 기사단국은 국외로의 확장에 적극적이었으며, 레에헤 산맥 이남의 네라다 지역, 아마자쿠라 반도 북부의 제도로 구성된 셰헤카사 지역은 이때 개척되었다.
이렘나 기사단국은 국경 중심으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때로는 이렘나의 국경으로부터 먼 지역까지 원정을 가기도 하였다. 칼의 비 시기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전몰자들의 검이 떨어지는 모습이 '칼의 비'와 비슷하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바샨니 반란(3824년~3831년)
3824년 3월 2일, 피차별 종족이었던 바샨니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여파로 기사단은 원치않는 내전을 치뤄야 했으며, 바샨니인들에게 무조건 탄압이 아닌 어느정도의 유화책을 통해 바샨니인들을 통치하게 된다.
철의 끝(3831년~3916년)
철의 끝 시기, 안정적으로 변한 치세에 이렘나 기사단국은 대파랑의 재현을 위해 다시 전쟁준비를 시작한다.
이렘나의 기사단은 새로운 정복 전투의 빠른 진행과 마법의 투사를 위해 파시헤 지역, 니카히 지방을 중심으로 마법 천공기를 제작하게 된다. 마법 천공기는 알루레아[37]를 투사한 사트 외부의 마법매개체의 힘을 사트에 현실화 시키는 것으로, 사용하는 모습이 마치 성좌와 같다고 하여 은빛 철성좌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이렘나의 마법 능력으로는 천공기의 사용은 물론 유지 또한 힘들었고, 정확하게 설계되지 못한 천공기는 주위의 마법기류와 생명체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은빛 철성좌 사건이라고 부른다.
엘레르디의 그늘(3916년~4048년)
3916년 8월 20일, 이렘나 기사단국(이렘나어: Enav k'Iremna)의 은빛 철성좌 사건은 북메디아지역의 힘과 마법의 균형을 깨트렸다.[38] 기사단국의 후견국이었던 엘레르디 왕국(이렘나어: Ez'Michniy k'Ellerdie)은 태세의 안정, 반발적 행위 종결 및 계도적 복속을 명분으로 이렘나 기사단국을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엘레르디의 그늘의 막이 오른다.
이렘나 기사단국의 인구와 군대는 엘레르디 왕국에 비해 숫자가 많았지만, 기술 수준과 경제력은 압도적으로 미개했다. 게다가 엘레르디 왕국의 지배를 환영하는 자도 많았기에 이렘나 기사단국은 엘레르디 왕국에게 쉽게 복속당한다. 엘레르디 왕국은 이렘나 기사단국을 엘레르디 왕국 산하의 이렘나 기사 제후국[39]과 엘레르디령 레이헤릴[40][41]로 재구성하게 된다. 다만, 엘레르디 왕국은 레에헤 산맥 남부의 네라다 지방과 북메디아 대양 너머에 위치한 셰헤카사 제도까지 점령할 생각이 없었기에[42] 이 두 지역은 엘레르디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네라다-셰헤카사 주권연합을 구성하게 된다.
131년동안의 엘레르디의 지배는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렘나인과 바샨니인 모두 이전의 이렘나 기사단국 시절보다 더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노예에 불과했던 바샨니인들의 권리가 상승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엘레르디들은 고등 마법과 소환수 기술, 생명 관리와 전투기술을 알려주어 이렘나인과 바샨니인들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역시나 기사단장의 선출이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의 기사단장들은 전 후 시기와 비교했을 때 더 긴 임기를 지냈다.
엘레르디 지배하의 이렘나는 그 이전의 600년동안의 시간을 후회로 내다보게 만들 정도로 빠르게 발전해왔으며, 야만적인 유목민 국가에 불과했던 이렘나는 이 시기를 거치며 발전된 요정왕국의 일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엘레르디 왕국에서는 이렘나인의 마법에 관심을 가지고 발전과 동시에 엘레르디식으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초기에는 수많은 이렘나인들도 엘레르디식 마법 해석에 찬성하였으며, 이 시기에 이렘나의 마법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3973년 3월경 벌어진 재폭풍사건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게 된다.
재폭풍
이렘나인들과 바샨니인들은 엘레르디로부터 전수된 마법을 남용했고 셰르반도 전체의 마법의 균형은 불안정해졌다. 불안정해진 마법의 기류가 자연을 기폭시켜 만든 사건이 재폭풍사건이다.
3973년 3월 22일, 이렘나의 수도가 위치한 하스투라페흐 연호의 마법기류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마력 기류의 붕괴는 주변의 대지를 침강시켰고, 이렘나 지역의 60% 이상이 수몰되고 만다. 엘레르디 왕국은 이 사건의 발생을 예견하여 예방하고자 했으나 교육수준이 매우 낮았던 이렘나인들과 바샨니인들은 따르지 않았으며, 이와같은 행동은 재해로 인한 피해를 키우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이렘나-바샨니인의 36%가 사망하고, 52%가 살던 지역을 잃게 되었다.[43]
엘레르디 왕국은 이 사건을 막기 위해 요정의 고대 마법을 꺼내들었고 본토의 마법 기류를 일그러트리면서까지 노력한 결과, 많은 이렘나인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낯선 마법식에 두려움을 느낀 이렘나-바샨니인들은 재폭풍의 원인을 엘레르디로 돌리게 된다.[44] 처음에는 작은 오해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이 소문은 이렘나의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결국 이렘나-엘레르디 전쟁의 원인이 된다.
이렘나-엘레르디 전쟁(4016년~4048년)
재폭풍 이후 엘레르디들에 대한 이렘나인들의 인식은 차차 나빠져가기 시작했다. 엘레르디가 이렘나를 말살시키려고 한다는 음모가 사르자니케브 평야를 중심으로 천파만파 퍼져나갔고, 재폭풍으로부터 이렘나를 지키려고 했던 엘레르디들은 이렘나 사회에 퍼져나가는 음모에 의해 학살자, 교활한 압제자와 같은 인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결국, 이렘나 사회는 엘레르디들에게 재폭풍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는 명분으로 이렘나 대항거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치안이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자극받은 바샨니인들도 대항거에 참여하고, 이들은 흑랑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엘레르디 배제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렘나의 사회에서는 엘레르디는 선각자로 취급되었기에 엘레르디 왕국을 돕는 이렘나인과 바샨니인도 있었다.[45] 이들의 충돌은 대환원이라고 불리워지는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 우리는 그들을 구원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마법을 잠식하려 했고 파랑의 시기로부터 내려온 전승의 기억을 꺼트리려고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멸절되어야 한다.
” — 4016년 1월 7일, 349대 기사단장 하라페 케사할[46]의 선언
“ 전승의 물결이 잠잠해진 후, 우리의 파도는 멎을 뻔했습니다. 엘레르디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비로 일궈낸 칼로 그들의 목을 겨누었고, 선각자들의 자비를 피로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멎어가는 생명을 구원한 그들의 행위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성급한 판단으로 인도된 길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됩니다. 형제들이여, 어긋난 칼자루를 쥔 자들을 멈추어주십시오. 자비를 기억하는 자의 별자리는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앞서가는 자에게 영광을!
”
4021년 4월 7일, 엘레르디 왕국은 내전의 조정을 포기[49], 직접 개입하기 위해[50] 국가의 고위 마법병단[51]을 이렘나 지역에 파견하였다. 이때 일시적으로 왕국 본토의 방어가 약해졌으나, 주변 어느 국가의 군사력으로는 이렘나 본토지역은 물론이고 실리킬 숲의 입구로도 진입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엘레르디 왕국은 은빛 철성좌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이렘나를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렘나인들은 이전과는 달리 엘레르디의 많은 기술을 계승한 상태였고, 그것은 곧 상대해야하는 엘레르디 왕국의 국가적인 피로로 직결되었다.[52] 이렘나에 의해 재해석된 '앞서간 자'의 기술은 엘레르디 왕국 군대에 유의미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세셸브 지방에서 일어난 금속 독 오염사건은 엘레르디 왕국이 가지고 있던 수룡 및 해저체 부대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며, 엘레르디 왕국은 멸망하는 날까지 이 피해를 복구할 수 없었다.
4039년, 이렘나-엘레르디 전쟁에서 흑랑단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중립을 지키고 있던 네라다-셰헤카사 주권연합의 해저병력이 안개가 낀 날씨를 통해 엘레르디 왕국의 앞바다까지 잠행, 1달에 걸친 작전으로 공간마법을 완성시킨다. 안개의 천칭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 일시적으로 이렘나 반도에서 엘레르디의 수도 레르디에로 이어지는 일시적인 쇄도교가 완성되고, 이것은 엘레르디 멸망 전쟁으로 불리워지는 엘레르디 왕국 본토 전쟁으로 발산된다.
국가적인 피로가 심하게 쌓여있던 엘레르디 왕국은 갑작스럽게 이어진 확전에 엘레르디 본토와 이렘나 지역 모두에서 승기를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4047년 하반기가 될 무렵에는 고대의 요정왕국이라는 이름도 무색하게 대부분의 영토가 역으로 점령당한다.
엘레르디 멸망 전쟁의 후반에서 엘레르디 왕국은 기적과도 같은 승전을 만들어냈지만, 세태를 바꾸기는 힘들었다. 결국, 19년동안 이어진 전쟁을 끝으로 1363년부터 이어져내려온 요정왕국은 멸망하게 된다.
길지 않은 전쟁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하였으며, 엘레르디는 분노를 피할 수 없었다. 패전한 엘레르디들은 이렘나의 전통적 전투 예법에 따라 처분이 결정되었다. 수도였던 레르디에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엘레르디들은 소개되어 이렘나 본토로 강제이주되었으며, 일부 저항을 계속하던 지역은 흔적이 남지 못하도록 '정화'되었다.
본토로 이주당한 엘레르디들은 생존에 부적합한 환경에서 강제적인 노동으로 대부분이 죽어갔고, 살아있는 엘레르디들은 마법 및 전투노예로 전락하였다. 이와같은 조치로 이렘나 철랑대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레르디에 대한 이와같은 처사에 불만을 느낀 이렘나-바샨니인들도 여럿 있었다.[53] 그중의 몇은 죽어가는 엘레르디들의 신원을 보장하고 상부의 명령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철랑대의 문화적인 특성상 그 누구도 항명하지 않았다.
“ "파랑의 마지막 전승이 끝나고, 우리가 이곳에 도래한 이후로부터 엘레르디들은 우리의 선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주변의 증오에 휩쓸려 사라졌겠지요.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고 가르쳤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철각 위의 피가 된다면, 무엇이 우리를 계도하며, 누가 이렘나의 어두운 별자리를 비추겠습니까?"
"우리의 힘이."”
이렘나 철랑대(4048년~)
승전의 이후, 이렘나 기사 제후국과 엘레르디령 레이헤릴의 모든 지역은 새로운 기사단 연합 구성에 동의하였다. 네라다-셰헤카사 주권연합이 이에 가입하는 형태로 4048년 2월 15일, 이렘나 철랑대가 완성된다. 이렘나 철랑대의 명명은 파랑 기병대의 철랑 선봉대에서 유래했다.
엘레르디 왕국의 수도였던 레르디에 지역은 구 엘레르디 왕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리킬 숲 지역의 감시와 엘레르디 왕국의 재건 방지를 위해 레르디에 군정청이 세워졌으며, 이렘나 철랑대의 일원으로써 참여하게 되었다.
실리킬 숲 재개척 사건을 전후로 전후 철랑대 시기와 실리킬 이렘나 시기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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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철랑대 시기(4048년~4610년)
이렘나 철랑대의 수립 이후, 엘레르디들이 노예로써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엘레르디의 고통은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서진에 의해 발생한 공포로 실리킬 재개척이 허용되면서 끝난다.
아미르비아 탐험대의 북메디아 원정(4427년)
자세한 내용은 북메디아 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미르비아 탐험대의 북메디아 원정에서 실루나 클라시에(자소크어: Klasie Evenira Siluna XXVII, 이렘나어: s’Iluna Klasie)에 억류사건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크리상테스 왕국 방계 귀족 출신이었던 실루나 클라시에는 포로의 신분에서 벗어난 이후 이렘나 철랑대에 남아 515대 철랑대장이 된다. 실루나 클라시에가 철랑대장이 된 이후, 이렘나 철랑대는 자소크 철학단, 크리상테스 왕국, 시메타시스와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실리킬 숲 재개척(4610년)
주변 지역의 정세 혼란으로 인해[57], 이렘나 철랑대는 재폭풍이후로 몇백년간 진행되어왔던 인구 포화 문제를 해결하기 [58] 고대 엘레르디들의 숲인 실리킬 숲을 재개척할 것을 결정 이와 동시에, 이렘나-엘레르디 전쟁이후 억압 받아왔던 엘레르디들은 이전까지의 탄압으로부터 어느정도 해방방을 수 있었다.[59]
실리킬 이렘나 시기(4610년~4985년)
실리킬 이렘나 시기는 이렘나 철랑대의 실리킬 숲 재개척이후 시기이다. 엘레르디의 탄압이 사라져가고, 외부와의 교류가 늘어났다.
4670년, 엘레르디 출신의 Kyluka Ashellu[60][61]가 557대 철랑대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역사상 2번째의 비 이렘나-바샨니계의 철랑대장이다. 엘레르디 출신의 철랑대장의 선출은 이렘나-엘레르디 전쟁 이후 몇백년동안 이루어졌던 엘레르디 탄압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렘나-앙둔 산업무역협정(4632년)
자세한 내용은 이렘나-앙둔 산업무역협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앙둔 제국의 19대 케피투, 곈할라 앙둔이 즉위하고, 앙둔 제국과 이렘나 철랑대는 서로의 발전을 위하여 이렘나-앙둔 산업무역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서로의 외교적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터라,[62] 앙둔 제국이 한 요구의 대부분이 받아들여져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앙둔 제국은 최초로 이렘나 철랑대의 본토에 대사관을 세우게 되었으며, 본토에 공장을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장이 들어섬에 따라, 앙둔의 갑인들이 세셸브 지방에 거류하게 되며, 몇몇 갑인[63]들은 이렘나 철랑대의 법도를 따라 기사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외부인들이 이렘나 철랑대의 일원이 된 사례는 있어왔으나, 이와 같은 규모의 편입은 이렘나 철랑대 역사상 최초였다.
아마자쿠라 혁명 개입(4647년~4650년)
아마자쿠라의 정세 불안은 아마자쿠라와의 교역이 전체 교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이렘나 철랑대의 개입을 부르는 원인이 되었다. 이렘나 철랑대는 텐메이인의 보호 명분으로 해외 원정을 감행, 아마자쿠라 서북부에 아다키 집정구역을 설립하게 된다.
이 행동은 아마자쿠라에 영향력을 펼치던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자극했고, 텐메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텐메이 전쟁(4680년~4682년)
텐메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렘나 철랑대는 아다키 집정구역을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게 반납하게 된다. 전쟁의 패전은 이렘나사회에 분노를 가져왔으며 사회적인 혼란으로 직결된다.
이때, 아다키 집정구역의 신민중 1,107,265명은 이렘나 철랑대의 영토로 탈출하게 된다.
셰니야 섬 개척(4917년~5003년)
이렘나 철랑대가 극북에 위치한 셰니야 섬을 개척한 사건이다.
셰니야 섬은 극지 중앙에 위치한 만큼 극한의 기후를 가지고 있어, 남부의 9월의 항구를 제외하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셰니야 섬은 고립된 지역이었으나, 있어서는 안될 생물군계가 존재하거나, 마력이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는 등 이상한 흔적들이 있었다.
신산구 농단 사건(4927년~4957년)
자세한 내용은 신산구 농단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렘나 철랑대의 주북메디아 산업단지에서 기술을 탈취한 기술자들이 미르부슈의 둥지 북부 해안을 무력 점거한 이후, 모조품을 만들어 벌어진 경제적, 군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렘나의 경제는 이권을 노린 북메디아 각국에 의해 취약성이 밝혀졌으며,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한카-이렘나 자유무역협정 (4940년)
이렘나 철랑대는 4940년 자소크 철학단을 견제하기 위해 한카 교회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다. 이 협정 이후로 이렘나 철랑대와 한카 교회국은 우호국 상태가 되었다.
대고립 시기(4985년~5055년)
실리킬 이렘나 시기동안 수많은 외부 문명과 접촉한 이렘나 철랑대는 그들의 접근에 위협을 느꼈다. 특히나. 여러 국가들이 스스로의 이권을 두고 참여한 신산구 농단 사건 이후로, 이렘나는 주요 우호국에만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메타시스, 한카 교회국,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 자텐다 황금전단, 크리상테스 왕국, 앙둔 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는 이 시기에 거의 단절되었다. 특히나, 앙둔 제국에 대한 이렘나의 의존도는 점점 높아져갔다.[64]
국경 폐쇄(4985년)
지속되는 외부의 접촉시도를 위협이라고 판단한 이렘나 철랑대는 4985년, 육상 및 해상 국경을 폐쇄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국가가 무역상 피해를 보게 되었으며, 왕래가 허락된 앙둔 제국이나 자텐다 황금전단 소속 선박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65]
공포의 새천년(5000년)
5000년 1월 1일자를 맞이해 사트의 전 국가를 침공한 흉내이리는 이렘나의 각지를 침공했으며, 이렘나는 흉내이리을 적대하기 버겁다고 판단하여 흉내이리를 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흉내이리 피해를 많이 본 셰헤카사 제도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고, 이후 셰헤카사 제도는 독단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이렘나 철랑대를 반대하는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두 역재(5055년~5095년)
이렘나의 불안한 시기는 결국 외부의 세력으로 인해 폭발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두 역재라고 부른다. 두 역재란 에옐누마의 습격과 흉내이리의 반란을 엮어 부르는 말으로, 이렘나의 본토지역은 이로 인해 초토화가 된다.
두 역재로부터 안전했던 지역은 실리킬 숲과 지형상 연결되지 않은 서부 기사단 지방, 셰헤카사 제도뿐이었는데, 이 지역들 역시 기사들이 차출되어 일정 수준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나, 셰헤카사 제도는 이 시기 직접적인 전화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5%에 가까운 인명 손실을 겪었다.[66][67]
에옐누마의 습격(5055년~5091년)
레에헤 산맥을 넘은 와이번계통의 아인종 카르몬바리에 의해 일어난 습격이다. 에옐누마는 카르몬바리의 수장으로써, 키가 작은 맹인 아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압도적인 숫자로 이렘나 철랑대를 곤경에 몰아넣었으며, 특히나 사르자네키브 평야, 북 레에헤, 녹슨 산맥, 네라다 지방의 피해가 컸다.
에옐누마는 5071년에 사망하였고, 카르몬바리도 5070년 경에 대부분 정리가 되었으나, 추후 일어나는 흉내이리 반란에 의해 잔당들은 5091년까지 이렘나 철랑대의 본토에 크게 피해를 주게 된다.
남극해 무력시위 참전(5064년~5066년)
자세한 내용은 남극해 무력시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에옐누마의 습격이 한창이던 5064년, 이렘나 철랑대는 남극해 무력시위로 인해 전쟁상태에 들어간 우호국 앙둔 제국과 한카 교회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앙둔 제국은 패배하게 되고, 이렘나 철랑대의 지방군들이 원정을 나간 사이 흉내이리 반란이 터지게 된다.
흉내이리 반란(5066년~5095년)
5000년, 공포의 새천년을 통해 이렘나 철랑대에 유입된 흉내이리들은 기사단의 귀감 취급을 받으며 이렘나의 사회에 녹아드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흉내이리의 간교한 함정이었다. 흉내이리는 먹잇감인 이렘나가 약해지기를 노리고 있었으며, 남극해 무력시위로 인해 병력의 일부가 부재한 상황을 틈타 흉내이리들이 일제히 반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렘나 철랑대는 이에 대비를 할 수 없었으며, 30년이라는 장기간을 쏟아서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전조 시기(5095년~)
두 역재 이후, 이렘나의 인구는 20%가 감소하였다. 그 어떤 무력시위체도 이 재난을 막을 수 없었다. 각 지방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맞는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무력시위체는 몰락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따라 이렘나를 맞추어나가고자 타협 혹은 무력을 사용했다. 그 사이 이렘나 내부의 분열은 점점 커져갔다.
또한, 남극해 무력시위에서 앙둔 제국과 한카 교회국은 패전으로 인한 혼란기를 겪었다.[68] 이것은 두 국가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은 이렘나 철랑대에 경제적 위기를 일으켰다.
전조 시기에는 이렘나의 각 지역에서 다양한 사상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코스모주의, 미래주의, 기원주의가 있다.
각주
- ↑ 1.0 1.1 1.2 2024년 12월 23일 06시 49분 49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 ↑ 이렘나 북부 및 서부 저지대, 현재의 수몰지구.
- ↑ 세셸브 지방
- ↑ 하늘 협곡을 제외한 이렘나 중남부 및 동부, 현재 이렘나 반도.
- ↑ 하늘 협곡
- ↑ 네라다 지방
- ↑ 셰헤카사 제도
- ↑ 레르디에
- ↑ 레르디에와 레헤네하스투라페흐를 제외한 실리킬 숲
- ↑ 레헤네하스투라페흐
- ↑ 한카-야마타이계 문명
- ↑ 재폭풍의 영향으로 현재는 이렘나 반도와 야마토 반도로 나뉘었다.
- ↑ 구 셰르반도의 바샨니인들은 몇개의 커다란공동체와 소속 개체들을 제외하면 원시살고있었다.
- ↑ 이것은, 엘레르디의 도움으로 국가를 편하게 이끄는 것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타 국가의 도움없이 국가를 유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엘레르디의 방침이었다.
- ↑ 이렘나의 철제 기술이 발전한 것은 풍요에 따른 것이 아닌,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 ↑ 서로간의 의견충돌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 ↑ 수도지역이었던 하스투라페흐 연호와 북부 기사단 지역, 서부 기사단 지역은 직할령으로 취급되었다.
- ↑ 19.0 19.1 19.2 19.3 19.4 현재는 수몰
- ↑ 20.0 20.1 20.2 20.3 20.4 20.5 아르세른 이렘나 기사단에게 멸망
- ↑ 21.0 21.1 21.2 21.3 얼음 해안 전쟁 기사단에게 항복
- ↑ 하스투라페흐 정통기사연합에게 항복
- ↑ 니다 연합에게 멸망
- ↑ 북부 크리할니킬의 숭고한 기사단에게 멸망
- ↑ 25.0 25.1 시네도라 파랑 기사단에게 멸망
- ↑ 강철 연합기사단에게 항복
- ↑ 엘레르디의 보호를 바라고 공국을 자처한 파벌이다. 그러나 엘레르디 왕국은 아르세른 이렘나 기사단의 제어를 제외하면 이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
- ↑ 크리할니킬 구국기사단에게 멸망
- ↑ 29.0 29.1 29.2 스스로 와해
- ↑ 30.0 30.1 30.2 하스투라페흐 정통기사연합에게 멸망
- ↑ 체나냐의 바닷사람을 등용하여 한때 전 이렘나 영지의 72%를 차지했던 파벌이다. 이 파벌의 준동을 전후로 내전의 전후가 나뉜다.
- ↑ 셀바페 권위기사단에게 멸망
- ↑ 33.0 33.1 사르자니케브의 동지들에게 멸망
- ↑ 시산브라이 동맹에게 멸망
- ↑ 35.0 35.1 35.2 얼음 해안 전쟁 기사단에게 멸망
- ↑ r'Achentzanya
- ↑ 엘레르디 왕국으로부터 훔쳐온 마법을 이용한
- ↑ 특히나 성좌를 만들기 위한 알루레아의 사용은 이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 ↑ 재폭풍 이전의 북부와 서부
- ↑ 재폭풍 이전의 동부와 남부
- ↑ 레이헤릴은 엘레르디의 명칭으로 이렘나를 부르던 것이다.
- ↑ 이 지역은 아직 개척 중으로, 이렘나의 정식 지역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확장 지역이라고 간주되었다.
- ↑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북부, 서부지역의 소멸으로 피해가 컸다.
- ↑ 재폭풍을 예방하기 위해 엘레르디들이 곳곳에 걸어놓은 고대 마법은 이렘나인들의 의심을 사기 좋았다.
- ↑ 중부-동부지방과 이키림 종단은 엘레르디의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 ↑ Harape k'Esahal
- ↑ 재폭풍 이후의 수도이다. 셀니키히는 전통적으로 엘레르디에 우호적이었다.
- ↑ r'Ahakpechne v'Usetzrche
- ↑ 엘레르디는 이렘나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 행동을 오판하여 사건을 키워버린 이렘나 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이렘나 내부에는 엘레르디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도 일부 있었기 때문이었다.
- ↑ 크리토날(엘레르디어: Krytonal)이라고 불린다. 알루레아를 이용한 전투마법과 레네이다를 사용한 테이밍 마법의 정점에 오른 엘레르디들로 이루어져있다.
- ↑ 이렘나는 정면 공격을 회피하는 대신, 게릴라 전술 사용으로 엘레르디에게 피해를 주었다. 이것이 엘레르디 멸망 전쟁으로 발산하기 전까지 23년이나 걸린 이유이다.
- ↑ 특히나, 파랑전승의 이키림 종단을 중심으로 이와같은 반발이 거셌다.
- ↑ 사힐 지방은 90% 이상이 이키림 종단이다.
- ↑ da'Prefa m'Irzenginav
- ↑ r'Akam v'Shenhepekada
- ↑ 주변 국가에서 아투제르인들이 난민으로 넘어왔으며, 인구의 11%를 차지하게 된다.
- ↑ 이렘나 반도 지역은 인구 부양력이 낮아 현재의 인구도 버티기 힘들다.
- ↑ 이 사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레르디의 고대 도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엘레르디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 심지어, 그녀는 라나실 출신으로, 철랑대장으로 선출되기 전 한번도 이렘나의 본토에 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 ↑ 그녀는 55세의 나이로 철랑대장이 되었다. 1700~2000년 가량의 수명을 가진 엘레르디로서는 어린 나이이다.
- ↑ 이것은 이렘나 철랑대에 파견된 다넹치 일루군이라는 외교관의 역할 이 컸다.
- ↑ 450여명
- ↑ 대고립시기 이렘나는 경제 대부분을 앙둔 제국과 한카 교회국에 의존했다.
- ↑ 이 결정으로 인해 자텐다 황금전단은 많은 예산을 들여가면서까지 코드 셰어링을 실행했다. 당연히 목적은 북메디아 북부 해양 무역의 정상화였다.
- ↑ 물론, 본토와 네라다 지방이 40% 가까운 인명 피해를 겪었던 것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었다.
- ↑ 셰헤카사 제도는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짓거리에 책임을 져야 했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하였다.
- ↑ 심지어, 한카 교회국은 분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