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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디 | [[1차 팔라디 내전]],[[2차 팔라디 내전]] 후 에스라스타 내부에서는 남메디아의 안보와 국가의 존속에 대한 의구심이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당시 당적 정지던 [[에스라스타 공산당]]이 불법적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경제적 지원을 하며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찾아왔다. | ||
에스라스타 곳곳에서는 불법 지원을 저지른 에스라스타 공산당에 대한 반사회주의 폭동이 도시를 집어삼켰고, 그에 대항하는 에스라스타 공산당원들은 그들에게 맞서 시위를 이어나갔지만 에스티헤 소재의 에스라스타 공산당 당사가 화재로 전소 당하면서 시위는 극에 달했다. 이는 5279년 치러진 86대 에스라스타 왕정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 에스라스타 곳곳에서는 불법 지원을 저지른 에스라스타 공산당에 대한 반사회주의 폭동이 도시를 집어삼켰고, 그에 대항하는 에스라스타 공산당원들은 그들에게 맞서 시위를 이어나갔지만 에스티헤 소재의 에스라스타 공산당 당사가 화재로 전소 당하면서 시위는 극에 달했다. 이는 5279년 치러진 86대 에스라스타 왕정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
2023년 7월 17일 (월) 15:5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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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에스라스타 연방 왕국의 역사를 다룬 문서.
민족 전국 시대
에스라스타인이 남하하며 원래 에스라스타 본토에 거주하던 원주민들과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 지역에 존재하던 공국이 난립하던 시대
자세한 내용은 에스라스타 민족 전국 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소국 시대
이렇게 해서 에스라스타인은 지금의 에스라스타 남부에 정착했는데, 이 중 트우레족과 코르카냐족이 북쪽으로 이동하며 분화된다. 카스메니족은 에스라스타 남부에서 일어난 부족 전쟁에 휘말려 동부로 밀려나 분화되었다. 테이아족은 부족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자신의 터전도 지켰다.
테이아족은 일반국가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테이아족은 철저한 신분제를 운용하고 있었고, 결국 차별적인 신분제에 반발하며 테이아족 피지배층을 포함해 남부 트우레족 · 코르카냐족 · 카스메니족이 에스라스타 봉기를 일으킨다. 당시 테이아족의 족장이던 가우레 기스멜카는 이를 단순한 시위로 생각해 소수의 병력을 보내 진압하려 하였으나,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반테이아군은 테이아족의 근거지로 행진했다. 이 사건을 흔히 에스라스타의 행진이라 한다.
반테이아군은 마을을 지나며 점점 세력을 불려나갔고 테이아군에서도 이탈자가 발생해 승기가 완전히 반테이아군으로 넘어갔다. 테이아족 수뇌부는 사건을 크게 만든 가우레 기스멜카를 파문시키고 새로이 게타멜라 기우셀카를 세운다. 그리고 반테이아군과 협상을 요청하는데 이것이 바로 에스라스타 연방 왕국의 시초가 되는 델레카 협정이다.
델레카 협정의 주 내용은 신분체계 철폐와 현 테이아족 수뇌부 청산이었다. 당연히도 테이아족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테이아군은 델레카 협정을 조금 축소시킨 펠레사넬 협정을 제시한다. 그러나, 테이아족 수뇌부는 이런 식으로 계속 거부하면 자신들에게도 이점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펠레사넬 협정 마저도 거절하고야 만다. 이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반테이아군은 테이아의 중심지인 벨리아센으로 쳐들어간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테이아군은 반테이아군에게 참패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테이아족 수뇌부 25명 중 3명을 제외한 전부가 사형당한다. 승리한 반테이아군은, 그렇게 에스라스타 공국을 세우게 된다.
공국 시대
에스라스타 공국을 세운 반테이아군도 결국엔 변방에서 농사를 짓던 일반 시민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결국 일반국가 수준으로 올라갔던 에스라스타의 경제는 다시 바닥을 친다. 과거보다 더 살기 어려워진 환경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테이아인의 복권을 원했고, 지금의 엘리엔시아 지역에서 그 유명한 알라사타 선언이 시작된다.
알라사타 선언은 엘리엔시아에서 저명하던 한 노인이, 삶이 힘들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 한 마디 한 것이 시초였다. 그 노인은 테이아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 경제는 회복하겠지만 우리 삶이 힘들어 질 것이고, 이대로 자유를 좇아 반테이아 세력이 쭉 집권하면 우리의 삶이 빈곤해 질 것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그 노인에게 그럼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었고, 노인은 경제와 자유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알라사타 선언이다.
엘리엔시아의 한 노인이 내뱉은 말은 전 에스라스타에 퍼졌고, 곧 반테이아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반테이아군은 자신들이 경제에 어둡고 국가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노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 노인은 해결책으로 과거 4민족이 섬기던 4왕조를 부활시키자고 답했다. 4왕조란 반테이아군과 테이아군의 내전이 한창이던 시기 왕으로 추대되었던 4개의 가문으로, 테이아인의 펠레니아 · 카스메니인의 일레스카 · 트우레인의 엘루울타 · 코르카냐인의 엑테토르테였다. 이들은 각 부족에서 가장 신성하다 여겨지는 가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왕조는 반테이아군의 집권과 부족의 반대로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반테이아군은 직접 가문들의 문을 두드려 수도 엘반티아로 데리고 왔고, 이윽고 4자 대면이 시작되었다.
그 날 엘반티아에는 전운이 드리웠다. 에스라스타의 역사에선 항상 협정이라 말만 하고 제대로 된 협정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엘반티아의 사람들은 모두 피난 준비를 하였고, 4민족의 주력군도 전부 엘반티아 옆 칼렘베이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대략 하루가 지난 후, 네 가문의 가주들은 모두 무혈로 자신의 집까지 돌아왔고, 그 다음 날인 6월 11일 곧바로 에스라스타 연방 왕국이 건국된다. 아코아 4자 협정에 따르면 합의안의 내용은 "꽃이 피면 테이아인, 초록색 잎이 나면 카스메니인, 단풍이 들면 트우레인, 첫눈이 내리는 날부턴 코르카냐인의 왕이 집권한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애매모호한 조항은 건국 10년이 되고 다시 열린 제2차 아코아 4자 협정에서 개편된다.
제1왕국 시대
이렇게 무사히 연방 왕국이 자리 잡는 듯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수가 열세였던 트우레인과 코르카냐인은 테이아인과 카스메니인에게 휘둘리고 만다. 대표적인 사건은, 하반기 트우레인과 코르카냐인의 집권기간에 테이아인과 카스메니인들은 왕정의회를 불참했던 것이었다. 트우레인과 코르카냐인은 항의했지만 묵살되었고, 결국 테이아인의 집권기간이 돌아오면서 에스라스타의 흑역사가 시작된다.
테이아인은 하반기 집권을 위해 트우레인들의 특별도시를 의도적으로 봉쇄하였고, 상대적으로 북쪽에 사는 코르카냐인들을 북쪽 야만인이라 몰아세워 사회적으로 고립시켰다. 트우레인들은 이 같은 차별에 반대해 우루투시에서 시위를 했는데, 이 시위 과정에서 테이아인 1명이 부상당한 것을 명분으로 테이아인은 시위에 참가한 트우레인들 탄압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 트우레인 시위 참가자 중 21%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게 된다.
그렇게 테이아인의 집권기간이 지나고 카스메니인의 집권기간이 시작되었다. 카스메니인은 코르카냐인들이 눈에 거슬렸고, 북방 야만인들을 핑계로 코르카냐인들을 엘루비안냐의 갈라시타 숲에 격리하고 불을 질러버리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다. 뿐만 아니라, 코르카냐 특별주에도 카스메니군이 상시 배치되어, 지나가다 보이기만 해도 죽이는 잔인한 학살극이 진행됐다. 결국 참다 못한 트우레인과 코르카냐인들은 베나울테르에 모여 무력시위를 시작했고, 트우레인과 코르카냐인 및 소수민족 차별 금지에 관한 법률이 통과하며 탄압과 학살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 당시 코르카냐인 정치가 멜리가울 시메키말사가 연설을 했는데, 그 중 현재까지 내려오는 말이 있다.
“ 만약 우리가 더 신체적으로 강하고, 기술적으로 진보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코르카냐인이 아닌 테이아인이나 카스메니인이었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에스라스타라는 왕국이 아닌 개별적인 자주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꿔 냈고 우리의 후대는 이렇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
트우레 탄압과 코르카냐 대학살을 겪으면서, 에스라스타인들은 한 민족이 정권을 잡았을 때 벌어지는 참극에 대해 깨우쳤다. 그리고 아코아 4자 협정의 개정을 요구했는데, 특히 이는 트우레인과 코르카냐인들의 도시에서 유독 심했다. 제94차 왕정의회 회의에서 제3차 아코아 4자 협정 계획안과 법의 개정이 의건으로 올라왔고, 그 당시 왕이었던 카스메니 왕조의 일레스카 카스메니 우테기아스가 이 안건을 최종적으로 통과시키며 제3차 아코아 4자 협정이 시행된다. 제3차 아코아 4자 협정의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민족을 멸시하거나 차별해선 아니된다.
둘,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집권기간에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있어선 안되는 만행이다.
셋, 각 민족은 자신의 민족을 지킬 수 있는 수단과 자신의 민족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기관이 존재해야 한다.[3]”
그리고 1차 개헌이 이루어지는데, "에스라스타는 왕의 힘으로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왕의 국가이다"라는 조항을 "에스라스타는 왕이라는 정신적 신념 아래 국민이 다스리는 국가로 왕은 단지 국민의 정신적 지주일 뿐이다."라 바꾼다. 이후 왕정의회의 의장은 왕이지만 결과는 의원들이 정하도록 바뀌었고, 일레스카 카스메니 우테기아스는 자의적으로 의건을 통과시킨 마지막 왕이 되었다.
제2왕국 시대
미카크 분할
제2왕국 시대에 접어들자, 정부는 기존에 사용하던 민족분할제를 폐지하고 행정구역을 편성한다. 그러나 소수민족을 자세히 따지지 않고 주류 민족에 집중해서 행정구역을 편성하다 보니, 민족 간 다툼이 크던 서부 미카크에선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당시 에스라스타에는 약 14개의 민족이 있었는데, 미카크는 그 중 12개의 민족이 살고 있을 정도로 다민족 주였다.
이 사건 이후 정책에 불만을 품은 다른 민족들이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미카크는 물론 최대도시인 피울네이비오신[4]까지도 남북으로 나뉘고 만다. 북미카크는 파우니에파[5]가 권력을 잡아 펠레네보스를 중심지로 삼았고, 남미카크는 이벨타파[6]가 권력을 잡아 아욱슈타멜을 중심지로 삼았다. 남북은 주지사도 따로 뽑고 주의회도 따로 운영하는 등 개별적으로 주권을 행사했고, 약 3년 간 갈등이 쌓인 끝에 미카크 내전으로 번지게 된다. 정부는 미카크 내전의 책임을 회피했고, 결국 미카크의 민간인들만 괜히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초반엔 남미카크가 기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승기를 잡았지만, 기스에서 새롭게 당선된 파우니인 계통의 주지사가 지원을 끊어버린 결과 북미카크가 승리한다. 하지만 12년 간 지속된 전쟁의 영향으로 파우니인과 이벨티인의 젊은이들이 거의 죽어버렸고, 미카크에서 살아남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양 민족은 각각 쿠에-기스와 가쟈로 이주한다. 현재, 미카크는 벨록쿠와인 밖에 남지 않았다.
미카크 내전의 종전 이후, 미카크 주민들은 정부에 크게 항의했다. 에스라스타 내 다른 주에서도 미카크 내전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했기에 이를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지던 찰나, 당대 왕이었던 엘루울타 트우레 아훅투아가 직접 사과하며 미카크 내전에 관한 법을 당장 마련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종전 10년이 지나고서야, 미카크 내전 전사자와 희생자를 추모함과 동시에 내전 재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북벌
에스라스타는 자꾸만 국경 인근에 출몰하는 북방 민족이 골칫머리였다. 결국 사건이 터지는데, 북방 민족이 펜기의 북쪽마을 페올루울테에 침범해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하고 만 것이다. 에스라스타의 왕 펠레니아 테이아 이레니아는 국방군을 준비시켜 펜기와 왈리의 북방을 평정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 후, 걱정하고 있는 국민 앞에 서서 대민연설을 시작한다.
“ 국민에게 묻겠다. 과인이 집권해온 지난 시간이 평안하였는가? 과인은 우리 국민이 최근 침입해 온 북방 민족을 불편하게 느낌을 알고, 이를 막으려 국방군을 보냈다……. 국민에게 묻겠다. 과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겠는가? 국민 중 과인보다 연고한[7] 사람이 필히 있을 것이다. 헌데 과인이 이리 말을 놓으며 아랫사람 대하듯 대해도 되는 것인가? 에스라스타는 지난 아코아 4자 협정에서 국민의 신분제를 철폐하고 노예를 해방했다. 근데 어찌 나 혼자 윗사람이 되는가? 오늘부터 과인은 국민의 위가 아닌 옆에서 같이 살아가며, 국민을 더욱 평안케 만드는데 힘쓸 것이다. 그럼 이제 다시, 국민에게 묻겠다…….
저는 북방 민족을 정벌하여 우리의 고유한 영토를 지켜낼 것을 강력히 천명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기 위해, 국민 여러분의 강력한 지지와 응원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국민께 묻겠습니다, 제가 북방 민족을 정벌하여 에스라스타를 더욱 안전하게 만드는데, 그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왕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민중석에선 환호가 쏟아졌고, 이런 왕의 충격적 행보는 다음 날 신문의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는 에스라스타 역사에서 유일하게, 왕이 자신을 낮추고 민중을 높힌 일이었다. 해당 연설로 하여금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왕은 국방군을 북부로 출동시켰고, 약 3년 뒤 국방군은 북벌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왕이 세상을 뜬 지 1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펠레니아 테이아 이레니아는 현재까지도 에스라스타인이 꼽는 최고의 왕이라 불리며, 국립학교 교과서의 1면에 적힌 "오늘도 우리의 평안을 기도하시는 이레니아 전하께 감사의 말씀을"이라는 문구에서 그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3해안의 비극
북방도 평정한 에스라스타에게 더 이상의 비극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3해안이라 불리는 주에 해적이 들이닥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많은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이에, 정부는 해안가에 위치한 주에 해안방위대를 배치하고 3해안에 각각 1억 페사를 지원했다.
북부의 발전
북방의 펜투벡, 왈리, 나르비아, 펜기, 가쟈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지역이었으나, 지역 별로 위인이라 할 수 있는 거물 정치가들이 등장하며 상황이 역전되었다. 펜투벡의 겔레키안 세케멘토는 북방 철로를 통한 펜투벡 북방 사업을 추진했으며, 왈리의 이리니키 셀라니오신은 관광사업 진흥 · 에트로파노스 첨탑 건립 · 주 방위군 확대를 일구어냈다. 나르비아의 페우라카우 니엘티바조는 투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적폐청산과 경제부흥을 이끌어냈으며, 펜기의 가한타 아오랄리는 자연국립공원 설립과 에스라스타 자연청 설립 유치를 성공시켰다. 마지막으로 가쟈의 이키티 아헨다시는 북방 철로와 야하넨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모두가 좋은 결과를 거두진 못했는데, 왈리와 나르비아가 그러했다. 왈리의 하루테 멜라안파이는 북방 철로 계약과 주 협약 조약을 파기해 왈리에 일방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나르비아의 우프라구 멜토키무카이는 왈리 통합책과 페쿠루사 장벽 건설 계약을 파기했다.
베코로사 전쟁
북부를 한 차례 평정했지만, 여전히 북방 민족의 침탈은 계속됐다. 이에 나르비아의 청년들이 모여 나르비아 수호군을 모집했고 나르비아 인구의 21%가 모이며 나르비아 북부 20㎞까지 북방 민족을 몰아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24명의 사람이 사망하고 200명의 사람이 다쳤는데, 무공을 높이 산 에스라스타 왕정청은 나르비아 주민들에게 국가보훈장을 하사했다.
테노레 혁명
테노레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발전이 부진한 주였는데, 인접한 주들이 대도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마저도 테노레 지원금을 감축하고 베시틴 쪽으로 돌리자, 분노한 테노레민족주의자들은 혁명을 시도한다. 명목은 부패한 정부를 타파하고 테노레의 자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독립 주장은 약해지고, 테노레의 부흥을 노리는 방향으로 노선을 튼다.
테노레민족주의자들은 그 당시 테노레에 있던 에스라스타 행정청 앞이나 에스라스타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누우이벨 산에서 비폭력 시위를 이어나갔으며, 이렇듯이 성숙한 시민 의식을 본 정부가 먼저 협상을 제안하였다. 불균형 발전 방지법을 제정함으로써 테노레 혁명은 완벽한 결과를 이끌어 냈다.
기스 분할
북기스와 남기스 간의 불화가 심화되면서 기스 분할안의 통과에 관심이 쏠렸다. 기스 분할안 회의 당시 참석한 국회의원은 42명 중 32명이었으며 찬성 21명 · 반대 10명 · 무효 1명 · 불참석 10명,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 의건이 통과되었다. 결국 기스가 분할되고, 다른 주들도 재편성을 원했다. 이에 에스라스타 주청은 행정구역을 분할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주의 경계조절은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북동탐험
자세한 내용은 에스라스타의 북동탐험 일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메데마 확장
자세한 내용은 에스라스타의 메데마 확장 일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
자세한 내용은 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에스라스타의 북메디아 탐험
자세한 내용은 에스라스타의 북메디아 탐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에스라스타 1차 정치적 내분
1차 팔라디 내전,2차 팔라디 내전 후 에스라스타 내부에서는 남메디아의 안보와 국가의 존속에 대한 의구심이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당시 당적 정지던 에스라스타 공산당이 불법적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경제적 지원을 하며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찾아왔다.
에스라스타 곳곳에서는 불법 지원을 저지른 에스라스타 공산당에 대한 반사회주의 폭동이 도시를 집어삼켰고, 그에 대항하는 에스라스타 공산당원들은 그들에게 맞서 시위를 이어나갔지만 에스티헤 소재의 에스라스타 공산당 당사가 화재로 전소 당하면서 시위는 극에 달했다. 이는 5279년 치러진 86대 에스라스타 왕정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현재
이처럼 기나긴 에스라스타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고 앞으로도 더욱 화창할 것이다.
각주
- ↑ 2024년 12월 21일 15시 41분 02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 ↑ 참고로 이 3번째 항목은 현재까지 유지되어, 각 민족은 각 민족으로만 이루어진 의회를 가진다. 이 의회는 가끔 왕정의회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며, 의회군이란 군대도 보유하고 있다.
- ↑ 펠레네보스
- ↑ 그 당시 미카크에서 20%를 차지했던 파우니인을 중심으로 뭉친 파
- ↑ 그 당시 미카크에서 21%를 차지했던 이벨티인을 중심으로 뭉친 파
- ↑ 年高한, 나이가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