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4657년 베하니아 항구가 완공된 직후 메데마 해양탐험대가 베하니아 항구에서 출발하였다.

제 1차 메데마 해양탐험대의 성과

제 1차 메데마 해양탐험대는

picanic gauso (직험탐험대원)

bilisi kinel (지질학자)

gahak kanel (선장,에스라스타 미카크 국립대학 방언학부 교수)

pilise helnja (탐험대원)

geku kisikiruk (베하니아 출신 탐험대원)

hembonel halak (조선업자)

hakumak gulusei (왕권 대리인)

jakusi niheto (기록원)

alak noidi (천문학자)

로 구성되어 있는 탐험대이다.

1차 해양탐험에서 탐험대원들은 북메디아와 남메디아에 조난 와중 신구르 대사막을 발견하였다.

에스라스타어로는 pelo mijase라 부른다.(커다란 해안가)

제 2차 메데마 해양탐험대의 성과 및 사건

1차 탐험대와 비교하여 2차 탐험대는 유난히 사망자가 많았다 -이유는 현재까지도 불명이지만 가장 유력한 설로는 구 바란지역을 탐사하던 대원들이 구 바란 군사잔당을 만나 대규모 학살 당했다는 설이다.

2차 탐험대는 남메디아 북부에 위치한 여러 국가들을 보게 되었다.

2차 탐험대는 탐험대원들의 신원이 비밀로 처리되었다.

2차탐험대는 내전으로 인한 바란의 멸망과 몇몇의 신생국가를 탐험했다고 전했다.

사설탐험대의 실종

4671년 사설탐험대가 공식적으로 허가되며 사설탐험대의 메데마 탐사가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에스라스타해양청 소속 대메데마 신속부서도 신설되며 에스라스타인의 메데마에 대한 감정이 고조되던 찰나,4699년 2월 중순에 출발한 아쿠타케호의 23명이 단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4894년 4월 21일,에스라스타 방범청이 실종자 23명을 사망처리하였고 사인은 해적으로 인한 타살로 판명냈다. 이에,유가족측은 아쿠타케호 피해자 모임을 개설하고 에스라스타 본정부를 고소했다. 또한 피해보상금을 요구하고 왕정청 앞에서 시위를 이어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