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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전
40세기, 아마자쿠라의 부상과 함께 아마자쿠라의 북쪽에 아마자쿠라인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본토와의 해상 무역을 중심으로 북방 개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개척은 주로 동부 해안과 일부 북부 해안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북방 개척의 중심지는 현재의 기리시마 일대였는데, 원주민이 이 지역을 부르던 명칭에서 따와 이후 북방 개척지를 야마토(大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자쿠라는 41세기 경, 이 지역을 공식적인 아마자쿠라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아마자쿠라 당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방지역은 여러 영주들의 영지로 나누어졌고, 각 영지의 중심지로 여러 지역들이 속속 개발되기 시작한다. 이들 중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이 오늘날의 무사시이다.
43세기, 한난의 난 이후 공로로 야마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 시노미야 시게노부는 여러 지방 세력을 정리하고 아마자쿠라의 시노미야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력과 재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영지였던 야마토에서 대규모 수탈과 징집을 일삼는다. 이에 반발하여 산발적으로 농민봉기가 발생하나 진압당한다.
4320년에는 야마토에서 주로 재배되던 북방벼에 북방벼마름병이라는 병이 퍼지기 시작하며 대규모의 아사자와 이민자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아마자쿠라 당국은 대규모 이민자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질것을 우려하여 시무슈강을 기점으로 봉쇄를 실시한다. 봉쇄 사실을 안 야마토인들은 이에 반발하며 5월 혁명을 일으키며 아마자쿠라를 사실상의 내전상태로 만들지만 군량의 부족과 무기의 열세로 인해 진압당한다.
이후 아마자쿠라에서는 사회주의라는 새 이념이 떠오르고, 무사시와 나가토를 중심으로 해안지역에서 이루어지던 도시화에 따라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여러 단체가 창설된다. 이들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사회민주노동당이 오늘날 공산당의 시초이다.
10월 혁명
아마자쿠라 당국은 외국의 다양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였지만 국가의 재정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마자쿠라 당국은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세율을 대폭 인상하였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무사시 시청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이지만 당국은 무력으로 진압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야마토 대지진으로 인해 야마토 동북부가 초토화되고 실직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자 사회민주노동당의 주도로 혁명이 발생한다.
4437년 11월, 사회민주노동당은 좌익 단체와 자유주의 단체, 직능단체 등 40여개 단체들과 연합해 야마토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고, 관공서와 경찰서 등을 점거하였다. 10월 혁명의 소식은 야마토 전역에 빠르게 전해져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가담하였는데, 무사시에 혁명군의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온 노동자와 농민의 수만 100만여명에 달했다.
사회주의 공화국 건국과 연방 성립
야마토에서 통제권을 획득한 야마토 공화국은 독립을 위한 아마자쿠라와의 평화 교섭에 나선다. 그러나, 아마자쿠라의 완전한 사회주의화를 원했던 사회민주노동당의 급진파와 일부 좌익단체가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노동당 보수파의 평화교섭을 규탄하며 쿠데타에 나섰다.
내전 도중의 쿠데타는 성공으로 끝났고, 사회민주노동당의 급진파는 당권을 잡고 사회민주노동당의 당명을 공산당으로 변경한다. 또, 통제중인 야마토 공화국의 영토를 3개로 나눠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과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한다.
아마자쿠라와의 내전에서는 양 측의 피해가 점점 누적되는 가운데, 누계 사망자 50만 명이 넘어서자 아마자쿠라에서 휴전을 제의, 이후 4440년에 양측을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서로의 영토에 영유권을 주장하는 종전협정을 체결한다.
위대한 서진
급진파가 장악한 사회민주노동당은 당명을 공산당으로 변경, 정치국 상무위원장에 사이토 마코토를 추대한다.
사이토 마코토는 야마토인의 생활권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서쪽으로 확장하는 서진정책을 추진한다. 이 서진정책에 투입된 인원은 인민군 25만 명, 노농적위대 60만 명으로 총 85만 명의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4444년부터 4496년까지 약 50년간 진행된 서진정책은 완벽히 성공해 현재의 셋츠까지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개척지에서는 기존의 민족들보다 야마토인의 수를 크게 늘리는데 성공하여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동화를 이루어냈다. 또, 서진정책과 더불어 이루어진 토목공사는 연선 지역의 개발에 더불어 각지의 생산품을 무사시로 가져오는 물류 개편에 큰 효과를 냈다.
하지만, 개척지의 민족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야마토인을 서부로 정착시키는 서진정책의 특성 상 토착 민족의 반발은 예견된 것이었고, 산발적인 소규모 봉기 끝에 자유주의자, 혁명 전의 자본가, 기타 민족들을 규합한 사이코 마코토가 야마시로에서 내전을 일으킨다.
적백내전
제1차 고이즈미 정권
고이즈미 준이치로 체제 (4508 ~ 4543)
고이즈미 긴모치 체제 (4543 ~ 4576)
고이즈미 레이지로 체제 (4576 ~ 4582)
당파체제기
과도내각 (4582 ~ 4584)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 (4584 ~ 4588)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 (4588 ~ 4592)
이시하라 신타로 내각 (4592 ~ 4595)
제2차 고이즈미 정권
고이즈미 마사요시 체제 (4595 ~ 4606)
고이즈미 에이사쿠 체제 (4606 ~ 4671)
전반기 (4606 ~ 4643)
고난의 행군 (4644 ~ 4653)
자세한 내용은 고난의 행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먀토는 아마자쿠라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위해 산업화, 군 팽창[3]에 막대한 예산을 집중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타난 대규모 이촌향도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농작물 재배 방식과 농장 경영 방식을 바꾼다. 하지만, 새 방식에 농민들이 적응되기 전인 4642년부터 4650년까지 엄청난 가뭄과 흉작이 전국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야마토는 4643년에 배급을 이전의 5분의 1 수준으로 줄이고, 다음해인 4644년부터는 배급제를 완전히 폐지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동안 아사로 인한 사망자는 100만 명 가까이로 추산되며,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또,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아마자쿠라 혁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아마자쿠라 일대에 외세의 개입을 허용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후반기 (4654 ~ 4671)
고난의 행군 이후 무너진 경제를 수습하기 위해 두 차례의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이 역시 실패하며 야마토의 경제는 산으로 가게된다. 이에, 공산당 제28차대회에서 고이즈미 에이사쿠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채택하기로 결정, 최대 항구인 히에이, 하루나를 포함한 전국 21개 항구에서 대외 무역을 전폭적으로 허용하기에 이른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피해는 점차적으로 줄어들어갔으며, 경제 지표들은 고난의 행군 이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체제 (4671 ~ 4730)
4671년 3월 4일, 고이즈미 에이사쿠가 사망하자 아들인 고이즈미 신지로 공산당 제1서기가 공산당 총서기에, 4일에는 국가주석의 자리에 취임하며 고이즈미 신지로 체제가 시작되었다.
4672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고난의 행군이 완전히 종식되었음을 선포했다.
4676년 4월, 고이즈미 신지로 총서기는 아마자쿠라 전역을 수복하기 위한 국가총동원령을 승인했다.
4677년, 이렘나 철랑대, 사흐러이스탄, 자소크 철학단,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에 아마자쿠라(남야마토)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는 요구서를 보냈다. 이에 대해 요구를 받은 대다수의 국가가 거부, 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대조국전쟁 (4679 ~ )
자세한 내용은 텐메이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선군정치기 (4679 ~ 4730)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자 고이즈미 신지로 총서기는 국가 비상사태에서는 군대가 행정력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선군정치를 새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사실상 무력화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공산당 대회는커녕 중앙위원회도 단 한 차례도 소집되지 않았다.
4730년, 고이즈미 신지로 총서기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며 선군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고이즈미 타다히코 체제 (4730 ~ 4763)
4730년 6월 17일, 고이즈미 신지로의 아들인 고이즈미 타다히코 공산당 제1서기가 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의 자리에 취임하며 고이즈미 타다히코 체제가 수립되었다.
4763년 1월 2일, 신년 기념 열병식 도중 기시다 후미오 공산당 제1서기가 오자와 이치로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기시다 후미오 제1서기는 고이즈미 타다히코를 탄핵,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해 기시다 후미오를 국가주석에, 오자와 이치로를 공산당 총서기에 임명했다.
고이즈미 타다히코는 지지세력의 도움으로 열병식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 북부로 피신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이후, 쿠데타 세력을 반혁명세력으로 규정, 인민군에 쿠데타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는 오자와 이치로가 군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무시되었다.
인민군을 동원하는 데 실패한 고이즈미 타다히코는 국경을 넘어 북부에 새 정부를 세운다.
오자와 이치로 정권
기시다 후미오-오자와 이치로 동맹내각 (4763)
- ↑ 2024년 12월 22일 08시 58분 15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 ↑ 징집 인력을 극적으로 늘리기 위한 산아증진사업도 넓은 의미의 군 팽창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