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셰스카테령 오모나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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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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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13 운동은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에
+ 1.13 운동 Zurenné 1.13[2] Utattona ma 1.1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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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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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5214년 1월 13일 | ||
장소 | ||
파우옴풋, 카모나툴로 등 | ||
원인 | ||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에 대한 셰스카테의 차별로 인한 두 국가의 갈등 극대화 | ||
교전국 | 셰스카테령 오모나섬 | 셰스카테 |
지원 세력 | 오모나 자유국 건국위원회 오모나섬 독립군 그 외 다수 |
셰스카테 국군 오모나군 |
상세 정보 | ||
[ 펼치기 · 접기 ] |
지휘관 | 무셉 마 아카타나[4] | 쇼우스 델 아우스판[5] 차소켈 텐 카이스터[6]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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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셰스카테령 오모나섬 국민 68만명 오모나섬 독립군 1.5 ~ 2만명 |
셰스카테령 오모나섬 경찰청 제9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 제20사단 |
피해 규모 | 군인 34명, 경찰 7명 사망 군인 113명 부상, 경찰 173명 부상 |
독립군 174명 사망 |
민간인 사상자 |
217명 사망 5409명 부상 81명 실종[7] | |
결과 | ||
혜오 협상 진행 셰스카테령 오모나섬 독립 | ||
영향 | ||
개요
1.13 운동은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로,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에 대한 셰스카테의 차별로 인한 두 국가의 갈등 극대화되면서 일어난 시위이다.
전개
셰스카테와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의 갈등
레니스카 대전쟁 이후 셰스카테와 셰스카테령 오모나섬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셰스카테 내에선 "속령 따위가 전쟁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침략만 당했었다" 라는 느낌의 말이 오간다라는 소식이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에 퍼졌다.
사실, 전쟁 이전에도 셰스카테에선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의 국민에 대한 차별이 오갔었다.
이로 인해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에선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으며 셰스카테령 오모나섬 내에서 소규모 단체였던 "오모나 자유국 건국위원회"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가입자가 약 6700명이 되는 등, 그 파급력이 컸었다.
AR의 오모나 갈등에 대한 중립 선언
셰스카테 본토와 오모나섬에서 지사를 설립한 AR 오닉서커트, AR 세요짐은 AR은 이번 오모나섬에서 일어나는 항거에 대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국가의 권력이나 공식적인 단체가 아닌 일개 사기업이 편을 드는 행위는 공정성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AR은 상황불문 셰스카테와 오모나섬의 서비스-교통-철도-물류 부문 산업을 성장시키고, 셰스카테의 교정시설을 일부 인수하기로 합의된 내용을 준수할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1.13 운동과 셰스카테의 진압
5213년, 오모나섬에서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큰 시위가 일어났다.
셰스카테와 관련된 것들은 보이는 대로 모두 부셨으며 시위참가자들 중 일부는 셰스카테의 국기를 가져와 불태우기도 했다. 시위에선 "Scheskatté = Hxesgat"[8] 이라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하지만 셰스카테에선 바로 계엄군을 보내 시위대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Scheskatté = Hxesgat" 이라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은 보이는 대로 제압당했다. 시위대는 화염병과 진압대에게서 뺏은 총 등을 이용해 진압대에 저항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진압대가 시위대보다 더 셀 수 밖에 없었다. 시위대의 4분의 1이 끌려갔고, 심지어 조사과정에서 고문을 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그리고 그 고문 속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 일로 인해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은 발칵 뒤집혔다.
한편에선 오모나 자유국 건국위원회가 1.13 운동전부터 오모나섬 독립군을 비밀리에 모집하고 있었다는 의혹이 돌고있었다.
결과
오모나섬의 독립
5214년 1월 13일, 시위 현장에 무장한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오모나 자유국 건국위원회가 모집한 오모나섬 독립군(또는 오모나섬 시민군)들이 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위에 나온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있는 계엄군에게 탈취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오후 4시 경, 그 규모는 더욱 커졌으며 TNT와 수류탄, 최루탄 등의 무기를 탈취해서 사용하는 등, 거의 내전에 준할 정도로 셰스카테 역사 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셰스카테는 오모나 자유국 임시정부 청사를 파괴하는 등 공격적인 태도로 나섰다. 그리고 독립군들을 체포해 살해하는 등, 비도덕적이고 반인류적인 행동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모나섬은 더 뭉쳤다.
아무리 체포를 해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셰스카테는 결국, 5214년 1월 16일, 셰스카테는 오모나 자유국 건국위원회 위원회장과 오모나섬 독립군 지휘관과 혜오 협상을 진행했다.
이 협상 이후 5214년 1월 21일, 셰스카테령 오모나섬은 셰스카테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2월 2일, 오모나 자유국이 공식적으로 건국되었다.
건국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대부분이 해냈다는 감정에 울기 시작했다.
오모나 자유국의 대통령은 오모나 자유국 건국위원회 위원회장인 무셉 마 아카타나(Mūpsep ma Akattana)가 되었고, 오모나섬 독립군에서 활동했던 모든 사람은 건국 당일 제정된 "T.M.T"(Tīlofeīloakwe mu Tūlogwottona)를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