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

다이아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17일 (금) 18: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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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에스라스타의 4670년대는 베하니아 항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가장 항해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에 당시 에스라스타 해양청 청장이었던 이데사야 아도르프는 왕정의회에 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이라는 원대한 정책을 내놓았으며, 이로부터 1년 뒤 해양정책의 첫번째 단계였던 사설탐험대가 허가됐다.

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 제1령 남부 해양정책

첫 발의일로부터 약 300년 만인 4905년 2월 12일, 드디어 남부 해양정책(pino-edradeskadel)이 발효되었다.

4921년 4월 13일, 탐사인원이 29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탐험대가 베시틴구르스미네에서 출행했다. 남부 해양탐험대는 반도를 발견하였으며, 2000여명의 인력을 배치하여 도시의 기반을 다지게끔 하였다. 4936년 5월 13일, 탐험대는 귀국을 위해 에스라스타 구르스미네 항구에 도착했고, 이듬해인 4947년 3월 1일에는 발견한 반도 지역애 디메르테스 자치령이 건국되며, 제1령은 완수되었다.

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 제2령 북부 해양정책

첫 발의일로부터 약 330년이 지난 4926년 1월 10일 드디어 북부 해양정책(kue-edradeskadel)이 발효되었다.

4937년 5월 말, 북부 해양탐험대가 비공개 출행했으며 4947년 3월 2일에 도착했다. 이후 유포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탐사인원은 27명이고 사망자는 11명, 중상자는 9명이었다.

북부 해양탐험대는 군도를 발견했고,근처에서 발견한 국가의 군락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다.

다만,외교사절단이 불의의 사고로 복귀하지 못하고 외교관계도 진전이 없자 에스라스타 정부는 제2령을 사실상 폐기정책으로 넘겼다.

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 제2-1령 북부 해양재정책

제2령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가자 해양청은 기항지 없이 바로 북메디아 서부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4982년 8월 초, 디메르테스 자치령 건국에 영향을 받아 바로 다음 달인 9월에 조금 더 보강된 탐험선으로 펜투벡이엘테에서 출행했다. 북부 해양탐험대는 잔잔한 만을 발견하였고, 저번 남부 해양정책 당시의 선정착민보다 2배는 많은 규모의 4000명 가량의 인력을 배치했다. 마침내 5030년 4월 2일, 헤르시테스 자치령이 건국되며 다사다난했던 제2령이 완수되었다.

대에스라스타 해양정책 제3령 동부 해양정책

첫 발의일로부터 약 430년이 지난 5034년 7월 9일, 동부 해양정책(rais-edradeskadel)이 발효되었다.

동부 탐험대의 배에 결함이 발견되어 재출항이 상당히 미뤄졌다.

5099년 2월 4일, 디메르테스 자치령에서 재출항했다. 동부 탐험대는 아트리아레니스카의 여러 무주지들을 기록하여 본국으로 보냈고 에스라스타 내부에선 본국과 가까운 아트리아보단 오히려 멀리 떨어진 레니스카에 새로운 터전을 구축하는 것이 더욱 국익이라 판단하였고, 5116년 탐험대가 복귀하자마자 10000명 가량의 대규모 인력을 보내 개간작업과 평탄화 작업을 실시했다. 5142년 마침내 테사시테스 자치령이 건국되었다.

이로써, 4670년대 실행됐던 원대한 계획은 5100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각주

  1. 2024년 11월 5일 12시 31분 26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