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사트}} {{전쟁 정보 | 상징색 = #ffca18 | 폰트색 = #231f1f | 전쟁_명칭 = 관-정 전쟁 (파관 전쟁) | 전쟁_원어명칭 = 官-政 戰爭 (破官 戰爭) | 전쟁_일시 = 5521년 2월 18일 ~ 5522년 1월 2일 | 전쟁_장소 = 신세이 왕국 | 전쟁_원인 = 대정탈환으로 인한 정규군의 위세 약화 | 제1_세력 = 신세이 왕국 | 제2_세력 = 신부관협회<ref>국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관들끼리 맺은 연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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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황 == | == 개황 == | ||
=== 북부 4관 멸망 === | === 북부 4관 멸망 === | ||
북부의 유력 4대관은 서로 협력해 가장 세력권이 넓던 [[나카우미(中海)관]]을 중심으로 뭉친다. 이후 정부군은 4대관의 집결지인 [[로우신현]] 인근을 봉쇄, 바다를 접하고 있는 관의 특성상 해상통로 또한 차단하며 보급망을 막았다. 식량부족과 여러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던 4대관 중 가장 세력이 약하던 [[오오요(大洋)관]]이 오오요 관군을 이끌고 투항하자 4대관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이후 [[에츠노(劣露)관]]이 [[타카노소라(高空)관]]의 수장을 암살, 정부군에게 항복하며 관국지위유지를 요청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며 나카우미관 또한 무장해제한다. | |||
=== 서부 히요케관 승전 기념 행진 사건 === | === 서부 히요케관 승전 기념 행진 사건 === | ||
한편 서부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히가시야마현]]의 오오사토정에서 관군들이 [[히요케관]]을 상대로 방어하고 있었지만 이후 [[토도마치관]]이 가세하며 [[라이키와현]]의 병력이 모두 포로로 잡히고 히가시야마의 사쿠라미즈시가 함락되며 히요케관이 크게 승리한다. 관국측의 승리 이후 사쿠라미즈시의 시청사 앞에서 히요케 오츠노모리의 승전연설 후 기념 행진 중 10명 가량의 관국측 병사들이 사망한 정부측 군인의 시신을 모아 화장시키며 조롱한 사실이 퍼졌다. | |||
=== 미야자와관 포위전 === | === 미야자와관 포위전 === | ||
[[이로도야마현]] 동부의 미야자와관은 군정청 습격 이후 [[츠키야마현]] 남부,[[아사유루현]] 북부까지 세력 범위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관국측은 지나치게 커진 미야자와관의 세력권에 부담을 느꼈고 츠키미야현 동부 방면의 관국 병력과 [[우메마치현]] 남부 병력을 대규모로 철수시킨다. 이 상황을 놓치지 않던 정부군은 신속히 북부의 군대를 이동시켜 [[히가시케이부]] 북부에 위치시키고 히요케관에 패퇴한 잔여병력을 아사유루현 서부에 배치하며 미야자와관을 광범위하게 압박해 나갔다. 미야자와관은 위기를 느껴 여타 관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가타현]]의 후퇴병력들은 [[소가이현]]의 [[고우미노츠노(後海角)관]]을 지원하러 이동했다. 이런 상황 속 미야자와관은 정부측과 협상하려 했으나 정부는 협상을 거부했고 포위 29일 째, 미야자와관의 관주인 미야자와 하쿠타가 사살되며 미야자와관은 함락한다. | |||
=== 서부 2관 멸망 === | === 서부 2관 멸망 === | ||
서부 히요케관의 승전 기념 행진 사건의 여파로 정부군의 서부에 대한 인식은 매우 안 좋아졌고 이를 계기로 미야자와관 포위전 군대와 서부 패퇴군까지 모여 서부 진공작전을 실시한다. 히요케관은 토도마치관과 중부에서 지원 온 [[고쿠요(曲江)관]]의 병력으로 [[니시케이부]]에서 방어했으나, 히요케관의 본진인 히가시야마현 서부까지 밀린다. 이후 히요케관의 관가가 전소되며 사실상 히요케관의 영향력이 사라지며 토도마치관과 정부군의 1:1이 된다. 토도마치관은 라이키와현 북부의 시치마치정으로 이동해 항전했지만, 옆 마을인 미우라 상륙작전으로 포위당해 함락된다. | |||
=== 중부 사카탄현 반관적 농민혁명 === | === 중부 사카탄현 반관적 농민혁명 === | ||
한편, 중부의 사카탄현에서는 고쿠요관의 서부지원 실패로 영향력이 낮아진 틈을 타 대규모 반관적 농민혁명이 발생했고 이에 정부측이 호응하며 고쿠요관이 불능상태에 빠진다. 고쿠요관을 재기시키려 [[세이지현]]의 [[무츠겐(勿言)관]]이 출정했으나 이미 정부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무츠겐관은 다시 세이지 내부로 후퇴한다. 정부군은 이를 쫓으며 북부군과 남부군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 |||
=== 중부 5관 멸망 === | === 중부 5관 멸망 === | ||
중부의 5관은 고쿠요관,무츠겐관,[[신마츠리(新祭)관]],[[헤이로우(杏琅)관]],[[유우타케(流竹)관]]이 세이지현부터 [[미나미코우현]]까지 종렬로 위치해있는데 정부군은 이런 특성을 이용해 고쿠요관을 점령 후 남부의 유우타케관과 북부의 무츠겐관을 먼저 공략했다. 이후 신마츠리관과 헤이로우관을 포위시키며 중부 5관을 일망타진했다. | |||
=== 남부 1관 멸망 === | === 남부 1관 멸망 === | ||
남부의 관들은 미야자와관을 배신한 후 결속력을 강화해 9관이 합세해 큐렌몬 연합을 창설했다. 하지만 가장 북부의 [[유키카와현]] 일대의 [[신킨(申緊)관]]이 큐렌몬의 군대가 오기 전 진공작전으로 인해 함락당하며 큐렌몬의 방어체계에 구멍이 생긴다. | |||
=== 하치렌몬 분할 === | === 하치렌몬 분할 === | ||
이후 큐렌몬은 하치렌몬으로 이름을 바꾸고 방어체계를 재조직하던 중 의견 충돌로 서부의 [[미오쿠(美旭)관]] 중심의 서부3관과 동부의 [[하이나이(海內)관]]<ref>하이나이관은 2곳이 있었는데 신부관협회가 창설되며 로우신현의 하이나이관이 나카우미관으로 개칭한다.</ref> 중심의 동부4관으로 분열된다. | |||
=== 하치렌몬 2관 멸망 === | === 하치렌몬 2관 멸망 === | ||
방어체계가 뚫린 신킨관 근방의 동부4관은 정부군에 의해 급속도로 패퇴했다. 이후 본진인 하이나이관과 소관이던 [[메이와(明和)관]]이 멸망하며, 사실상 동부의 관들은 수성전을 시작했다. | |||
=== 구니노미야관 배신 === | === 구니노미야관 배신 === | ||
서부의 [[구니노미야(九爾宮)관]]은 동부의 함락사례를 지켜보며 승리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 군대를 이끌고 정부군측에 투항한다. 이후 서부3관의 정보를 제공하며 미오쿠관의 보급로의 위치를 알려준다. | |||
=== 하치렌몬 4관 멸망 === | === 하치렌몬 4관 멸망 === | ||
이후, 정부군은 미오쿠관의 보급로를 끊으며 미오쿠관을 함락시키고 하나 남은 서부의 [[카게혼(影本)관]]이 동부의 [[나츠카사(夏傘)관]]에게 원병을 요청했고 [[야나기사무현]] 남부에서 결전을 치뤘지만 결국 패배하며 두 관 모두 멸망한다. | |||
=== 마지막 미야시로관 항전 === | === 마지막 미야시로관 항전 === | ||
마지막 남은 [[미야시로(宮城)관]]은 내부 관민들을 결속해 수성에 나섰고, 정부군은 회유와 협박을 하며 투항을 종용했으나 미야시로관은 거진 50일을 버텼다. | |||
=== 미야시로관 멸망 === | === 미야시로관 멸망 === | ||
하지만, 이후 식량난과 내부의 항의에 이기지 못해 문을 열었고 관주 미야시로 하츠노우타가 자결하며 미야시로관이 함락된다. | |||
=== 관-정 협약 === | === 관-정 협약 === | ||
거의 유일한 생존 관주인 구니노미야관의 구니노미야 겐센과 하야다테 아카하나노가쿠는 관-정 협약을 통해 사병을 금지시키며 신세이의 오랜 폐단이던 관국체제와 사병제도는 이 협약을 이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
== 민간 피해 == | == 민간 피해 == | ||
=== [[신오쿠보정 학살사건]] === | === [[신오쿠보정 학살사건]] === | ||
신오쿠보정은 가장 전쟁이 극심하던 남부 이가타 지역의 작은 마을이였는데, 이곳을 점령한 하이나이관이 이곳을 정부군에 협력한 마을이라 몰아가며 불을 지르고 대부분의 민간인을 몰살했다. 그렇게 총 600명 가량이 살던 작은 마을이던 신오쿠보는 학살 이후 약 10명만 생존하게 된다. | |||
=== [[시라카와정 무단재판사건]] === | === [[시라카와정 무단재판사건]] === | ||
시라카와정은 비교적 전투가 덜하던 소가이현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로 이곳은 전쟁 중 대부분의 기간이 관국의 지배 하였다. 하지만 1달 가량 정부군이 지배한 후 관국이 탈환했는데 이때 정부군에 협력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인민재판으로 수백명을 처형시킨다. 이 중에는 정부군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아사히카와 대화재]] === | === [[아사히카와 대화재]] === | ||
히가시야마현 서부의 히요케관의 영향 하의 도시던 아사히카와가 정부군에 의해 함락위기에 처하자, 히요케관은 청야전술이라는 명목 하에 민간인들이 거주하던 마을에 불을 질러 아사히카와의 거의 모든 인프라가 전소된다. | |||
=== [[하토야마 민정협회 관민 학살사건]] === | === [[하토야마 민정협회 관민 학살사건]] === | ||
거의 유일한 정부측 전쟁범죄인데, 하토야마는 히가시케이 남부에 위치해 수시로 점령 세력이 바뀌었는데 관민들이 민정협회를 계속해서 압박하자 정부군이 하토야마를 점령했을 때 정부군의 침묵 속 민정협회는 관민 구역에 침입해 무분별한 학살을 자행했다. | |||
== 각주 == | == 각주 == |
2024년 7월 9일 (화) 01:22 판
+ 관-정 전쟁 (파관 전쟁) 官-政 戰爭 (破官 戰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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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쟁_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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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_그림_설명}}} | ||
날짜 | ||
5521년 2월 18일 ~ 5522년 1월 2일 | ||
장소 | ||
신세이 왕국 | ||
원인 | ||
대정탈환으로 인한 정규군의 위세 약화 | ||
교전국 | 신세이 왕국 | 신부관협회[3] |
신세이 왕국 | ||
지원 세력 | 민정협회 | 스이레이파 |
상세 정보 | ||
[ 펼치기 · 접기 ] |
지휘관 | 하야다테 아카하나노가쿠 | 하이나이 쇼토쿠[4] |
---|---|---|
병력 | 12,700명 | 5,600명 |
피해 규모 | 893명 | [5] 1,002명 |
민간인 사상자 |
신오쿠보정 학살사건 시라카와정 무단재판사건 아사히카와 대화재 |
하토야마 민정협회 관민 학살사건 |
결과 | ||
정부군측의 승리 | ||
영향 | ||
아카하나노가쿠의 카이레이 개혁 완료, 문벌정치 개시 |
개요
5521년 2월 18일, 하야다테 아카하나노가쿠의 카이레이 개혁으로 큰 압박을 받던 관국들이 신부관협회를 창설한 후 사병을 축적하였고 대정탈환으로 약해져있던 정부군의 중추인 군정청을 대규모로 공격한 후 발발한 전쟁으로 각 지역에 산발적인 전투가 일어나 군인,민간인할 것 없이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신부관협회의 항복으로 신세이의 오랜 관국체제를 종말을 맞이하고 문벌정치가 시작된다.
배경
5515년 7월 1일,대정탈환이 시슈측의 패배로 끝나면서 관국들의 큰 지원군이었던 시슈를 잃은 관국들은 아카하나노가쿠의 카이레이 개혁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몇몇 관국들이 신부관협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작은 규모의 관국부터 큰 규모의 관국까지 신부관협회에 가입했다. 신부관협회는 정부군에 대항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사병을 대규모로 증설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정부군도 군확을 하려하였으나 여러 재정적 요인에 가로막히며 신부관협회의 성장을 바라만 보게 된다.
1차 군정청 습격 계획
5521년 1월 20일, 신부관협회는 히가시케이부의 군정청을 공격하기 위해 주변 관국인 미야자와관과 획책해 군정청을 습격한 후 점거하려 했으나 당일은 군정청에 각 지방군이 모두 집결해 대회의를 개최하는 날이었기에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2차 군정청 습격
5521년 2월 18일, 신부관협회는 다시금 미야자와관과 연합해 군정청을 습격했고 신속히 점거해 군정청장 하츠야마 유키노를 신부관협회의 본거지인 야나기사무의 하치렌몬관에 압송되었고 이 사실이 정부에 전해지며 정부는 오랫동안 미뤄왔던 관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개황
북부 4관 멸망
북부의 유력 4대관은 서로 협력해 가장 세력권이 넓던 나카우미(中海)관을 중심으로 뭉친다. 이후 정부군은 4대관의 집결지인 로우신현 인근을 봉쇄, 바다를 접하고 있는 관의 특성상 해상통로 또한 차단하며 보급망을 막았다. 식량부족과 여러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던 4대관 중 가장 세력이 약하던 오오요(大洋)관이 오오요 관군을 이끌고 투항하자 4대관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이후 에츠노(劣露)관이 타카노소라(高空)관의 수장을 암살, 정부군에게 항복하며 관국지위유지를 요청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며 나카우미관 또한 무장해제한다.
서부 히요케관 승전 기념 행진 사건
한편 서부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히가시야마현의 오오사토정에서 관군들이 히요케관을 상대로 방어하고 있었지만 이후 토도마치관이 가세하며 라이키와현의 병력이 모두 포로로 잡히고 히가시야마의 사쿠라미즈시가 함락되며 히요케관이 크게 승리한다. 관국측의 승리 이후 사쿠라미즈시의 시청사 앞에서 히요케 오츠노모리의 승전연설 후 기념 행진 중 10명 가량의 관국측 병사들이 사망한 정부측 군인의 시신을 모아 화장시키며 조롱한 사실이 퍼졌다.
미야자와관 포위전
이로도야마현 동부의 미야자와관은 군정청 습격 이후 츠키야마현 남부,아사유루현 북부까지 세력 범위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관국측은 지나치게 커진 미야자와관의 세력권에 부담을 느꼈고 츠키미야현 동부 방면의 관국 병력과 우메마치현 남부 병력을 대규모로 철수시킨다. 이 상황을 놓치지 않던 정부군은 신속히 북부의 군대를 이동시켜 히가시케이부 북부에 위치시키고 히요케관에 패퇴한 잔여병력을 아사유루현 서부에 배치하며 미야자와관을 광범위하게 압박해 나갔다. 미야자와관은 위기를 느껴 여타 관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가타현의 후퇴병력들은 소가이현의 고우미노츠노(後海角)관을 지원하러 이동했다. 이런 상황 속 미야자와관은 정부측과 협상하려 했으나 정부는 협상을 거부했고 포위 29일 째, 미야자와관의 관주인 미야자와 하쿠타가 사살되며 미야자와관은 함락한다.
서부 2관 멸망
서부 히요케관의 승전 기념 행진 사건의 여파로 정부군의 서부에 대한 인식은 매우 안 좋아졌고 이를 계기로 미야자와관 포위전 군대와 서부 패퇴군까지 모여 서부 진공작전을 실시한다. 히요케관은 토도마치관과 중부에서 지원 온 고쿠요(曲江)관의 병력으로 니시케이부에서 방어했으나, 히요케관의 본진인 히가시야마현 서부까지 밀린다. 이후 히요케관의 관가가 전소되며 사실상 히요케관의 영향력이 사라지며 토도마치관과 정부군의 1:1이 된다. 토도마치관은 라이키와현 북부의 시치마치정으로 이동해 항전했지만, 옆 마을인 미우라 상륙작전으로 포위당해 함락된다.
중부 사카탄현 반관적 농민혁명
한편, 중부의 사카탄현에서는 고쿠요관의 서부지원 실패로 영향력이 낮아진 틈을 타 대규모 반관적 농민혁명이 발생했고 이에 정부측이 호응하며 고쿠요관이 불능상태에 빠진다. 고쿠요관을 재기시키려 세이지현의 무츠겐(勿言)관이 출정했으나 이미 정부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무츠겐관은 다시 세이지 내부로 후퇴한다. 정부군은 이를 쫓으며 북부군과 남부군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중부 5관 멸망
중부의 5관은 고쿠요관,무츠겐관,신마츠리(新祭)관,헤이로우(杏琅)관,유우타케(流竹)관이 세이지현부터 미나미코우현까지 종렬로 위치해있는데 정부군은 이런 특성을 이용해 고쿠요관을 점령 후 남부의 유우타케관과 북부의 무츠겐관을 먼저 공략했다. 이후 신마츠리관과 헤이로우관을 포위시키며 중부 5관을 일망타진했다.
남부 1관 멸망
남부의 관들은 미야자와관을 배신한 후 결속력을 강화해 9관이 합세해 큐렌몬 연합을 창설했다. 하지만 가장 북부의 유키카와현 일대의 신킨(申緊)관이 큐렌몬의 군대가 오기 전 진공작전으로 인해 함락당하며 큐렌몬의 방어체계에 구멍이 생긴다.
하치렌몬 분할
이후 큐렌몬은 하치렌몬으로 이름을 바꾸고 방어체계를 재조직하던 중 의견 충돌로 서부의 미오쿠(美旭)관 중심의 서부3관과 동부의 하이나이(海內)관[6] 중심의 동부4관으로 분열된다.
하치렌몬 2관 멸망
방어체계가 뚫린 신킨관 근방의 동부4관은 정부군에 의해 급속도로 패퇴했다. 이후 본진인 하이나이관과 소관이던 메이와(明和)관이 멸망하며, 사실상 동부의 관들은 수성전을 시작했다.
구니노미야관 배신
서부의 구니노미야(九爾宮)관은 동부의 함락사례를 지켜보며 승리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 군대를 이끌고 정부군측에 투항한다. 이후 서부3관의 정보를 제공하며 미오쿠관의 보급로의 위치를 알려준다.
하치렌몬 4관 멸망
이후, 정부군은 미오쿠관의 보급로를 끊으며 미오쿠관을 함락시키고 하나 남은 서부의 카게혼(影本)관이 동부의 나츠카사(夏傘)관에게 원병을 요청했고 야나기사무현 남부에서 결전을 치뤘지만 결국 패배하며 두 관 모두 멸망한다.
마지막 미야시로관 항전
마지막 남은 미야시로(宮城)관은 내부 관민들을 결속해 수성에 나섰고, 정부군은 회유와 협박을 하며 투항을 종용했으나 미야시로관은 거진 50일을 버텼다.
미야시로관 멸망
하지만, 이후 식량난과 내부의 항의에 이기지 못해 문을 열었고 관주 미야시로 하츠노우타가 자결하며 미야시로관이 함락된다.
관-정 협약
거의 유일한 생존 관주인 구니노미야관의 구니노미야 겐센과 하야다테 아카하나노가쿠는 관-정 협약을 통해 사병을 금지시키며 신세이의 오랜 폐단이던 관국체제와 사병제도는 이 협약을 이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민간 피해
신오쿠보정 학살사건
신오쿠보정은 가장 전쟁이 극심하던 남부 이가타 지역의 작은 마을이였는데, 이곳을 점령한 하이나이관이 이곳을 정부군에 협력한 마을이라 몰아가며 불을 지르고 대부분의 민간인을 몰살했다. 그렇게 총 600명 가량이 살던 작은 마을이던 신오쿠보는 학살 이후 약 10명만 생존하게 된다.
시라카와정 무단재판사건
시라카와정은 비교적 전투가 덜하던 소가이현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로 이곳은 전쟁 중 대부분의 기간이 관국의 지배 하였다. 하지만 1달 가량 정부군이 지배한 후 관국이 탈환했는데 이때 정부군에 협력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인민재판으로 수백명을 처형시킨다. 이 중에는 정부군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사히카와 대화재
히가시야마현 서부의 히요케관의 영향 하의 도시던 아사히카와가 정부군에 의해 함락위기에 처하자, 히요케관은 청야전술이라는 명목 하에 민간인들이 거주하던 마을에 불을 질러 아사히카와의 거의 모든 인프라가 전소된다.
하토야마 민정협회 관민 학살사건
거의 유일한 정부측 전쟁범죄인데, 하토야마는 히가시케이 남부에 위치해 수시로 점령 세력이 바뀌었는데 관민들이 민정협회를 계속해서 압박하자 정부군이 하토야마를 점령했을 때 정부군의 침묵 속 민정협회는 관민 구역에 침입해 무분별한 학살을 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