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안 제국/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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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은 [[대파랑]]의 전쟁 과정 중 무역로를 통해 [[파랑 기병대]]에 대한 정보를 방대하게 수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침묵의 4년간 [[세이안 제국]]은 종신국들과 전쟁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11세기 이래로 북메디아의 거대한 제국이었던 [[세이안 제국]]의 생존과 화려한 부활은 필연이라 예상되었다. 실제로 3177년까지는 [[카가미가사키]], [[야에츠]]를 제외한 세이안 문명권의 어떤 지역도 [[대파랑]]에게 함락되지 않은 채 [[세이안 제국]]은 일방적으로 [[파랑 기병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또한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은 [[대파랑]]의 전쟁 과정 중 무역로를 통해 [[파랑 기병대]]에 대한 정보를 방대하게 수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침묵의 4년간 [[세이안 제국]]은 종신국들과 전쟁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11세기 이래로 북메디아의 거대한 제국이었던 [[세이안 제국]]의 생존과 화려한 부활은 필연이라 예상되었다. 실제로 3177년까지는 [[카가미가사키]], [[야에츠]]를 제외한 세이안 문명권의 어떤 지역도 [[대파랑]]에게 함락되지 않은 채 [[세이안 제국]]은 일방적으로 [[파랑 기병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 서머라 전쟁과 북메디아 서부 전역의 파랑 잠식 =====
===== 시모로쿠 전투와 북메디아 서부 전역의 파랑 잠식 =====
 
시모로쿠 전투는 참극으로 끝났으며, [[세이안 제국]]은 해안가의 일부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파랑 기병대]]에게 침탈당하게 된다.


== 황혼기 ==
== 황혼기 ==

2024년 8월 9일 (금) 13:08 판

개요

세이안 제국의 역사를 다룬 문서이다. AR 그룹의 역사는 자텐다인의 역사와 같기 때문에 자텐다 황금전단의 역사를 공유한다.

성립 이전

야마타이인의 도래

25부족 시기

야마토인북메디아 서부의 사구 지대에 정착하였으며, 25개 부족으로 분화되게 된다. 현재 북메디아의 가장 발전한 도시권인 에르뎀의 도시권은 이 당시에는 치수가 어려운 변경지대로 취급받았으며, 에르뎀과 가까운 동부로 갈 수록 땅이 척박하여 부족들의 관할 영토가 커진다.

부족화의

1121년 4월 15일, 실모렘인들이 야마타이인 세력에 참가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며, 단일한 체계 구축을 위해 야마타이 25개 부족이 모여 제국을 성립한 시기이다. 당시 야마타이인들의 부족은 실모렘인들과 영토 관할로 인한 분쟁을 겪고있었으며, 실모렘인들에게 영토를 일정 부분 하사하고 작위를 주는 대가로 야마타이 세력에 흡수시킨다.

이때 7개 부족은 이와 같은 결정에 반발하였지만[3], 부족화의에 의해 결성된 임시제국의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였으며 북메디아 서부에서 추방되어 프로테샤를 전전하게 된다. 이들은 이후 야마토인텐메이인의 선조가 된다.

초기 제국시기

초기 제국시기는 부족화의를 통해 이루어진 제정 시기로, 부족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다룰 수 있는 약한 황제를 선출하였다. 이로 인해 가장 작은 부족이었던 츠타기 부족의 오시아케 가문을 왕조로 삼았다.

세이안 제국의 초기 제국시기에는 부족 국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며, 이즈와리 왕조의 계층화협 이후 귀족 및 상인 계층의 대두로 중세 제국의 형태를 띄게 된다.

오시아케 왕조

츠타기 부족의 오시아케 가문은 1121년부터 1535년까지 세이안 제국을 다스린 가문으로 실질적인 권력이 전무한 왕조였다.

우에바시 왕조

1533년 오시아케 후유치카의 왕권개혁으로 인한 반발로 서부 부족들이 황제를 적대하기 시작했고, 1535년 타치구에 부족에 의해 황제가 살해되게 된다. 이후, 서부 부족들이 내부 회의를 거쳐 옹립한 것이 우에바시 왕조이다.

키타마에 왕조

우에바시 왕조는 1778년 스에시바[4]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인해 마지막 황제인 우에바시 카즈히토가 거세 및 실명형을 당하고 폐위된 후 귀족회의에서 새롭게 선출된 왕조이다.

이즈와리 왕조

1919년, 요카시라[5]에서 일어난 가문간 전쟁인 가을 전쟁으로 인해 키타마에 왕조가 멸문당하고 이즈와리 왕조가 들어섰다. 이즈와리 왕조의 이즈와리 킨페이는 성격이 유약하여 아무 힘도 없는 꼭두각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으나 그 예상을 깨고 세이안 제국의 중세를 여는 계층화협을 이뤄내게 된다.

계층화협

이즈와리 킨페이는 가을 전쟁으로 인해 세이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으나,

이즈와리 마사타다의 동방 원정

황금기

이즈와리 마사타다 이후, 제국은 북메디아 서부 무역로를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으며, 물질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유래없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복 및 개척군주 시기

이즈와리 히토하사(1979~2011)

이즈와리 히토하사는 린쿄 지방의 남부를 안정화시키고, 미복속된 실모렘 세력을 린쿄 지방에서 척결시켰으며, 바다를 건너 베센 지방의 소노르인들을 정복하여 봉신도시화 시켰다.

이즈와리 마츠나가(2011~2067)

이즈와리 마츠나가는 세이안 문명의 최대 도시가 되는 오닉서커트 시를 설립하여 제국의 동부를 안전하게 지켜냈으며, 내륙 지방 및 북부의 솔니 부족들을 공격하여 잠넨 협곡 전체를 장악하고 솔니의 위협을 차단했다. 그러나, 행정상의 한계로 이때 점령한 지역은 영구 영토화하지 못하였다.

이즈와리 센겐(2079~2091)

이즈와리 센겐은 제국 서부의 브레니스 왕국과 지속적인 전쟁으로 불안정했던 우라나기 지역[6]을 정복하였으며, 해양에서 접근해 오는 라루단 세력의 공격을 격퇴하고, 그들의 본거지였던 일몰 제도를 한시동안 정벌하였다. 이로 인해 일몰제도의 동라루단인들은 후에 자텐다 황금전단이 개척하기 이전까지 선박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이 후퇴하였다.

이즈와리 센겐은 복속된 소노르인들을 차출하여 솔브렌 왕국을 점령하여 사흐러 평원[7] 남부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즈와리 나리히데(2111~2125)

이즈와리 나리히데는 해군을 양성하여 가베 제국의 아우크 왕조 이전의 도시국가들을 복속시켰다. 이즈와리 나리히데 치세에 가베 도시국가체가 이루어놓은 무역망을 사용하여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즈와리 나리히데는 가베 제국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남부로 내려가 시웬 왕국, 레단티스 부족들을 짓밟아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북메디아 남부의 키네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이즈와리 나리히데는 솔브렌 왕국 너머 동방까지 나아가 이후 아르토이트 제국을 이루는 부토니아 연맹의 도시인 실다시소브론트를 점거하여 연공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즈와리 마사테루(2133~2163)

이즈와리 마사테루는 제국 서부를 위협하는 브레니스 왕국의 군세를 키요마이[8]에서 격퇴시키고 쟈타미[9]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즈와리 마사테루 시기 세이안 제국은 가베 내륙지방까지 봉신국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북메디아 해협의 퀼로인 부족과 접촉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즈와리 마사테루 시기인 2160년, 복속되었던 솔브렌 왕국은 독립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이즈와리 마사테루는 진압을 위해 직접 친정한다. 전쟁을 시작하자 마자 솔브렌 왕국은 국토의 56%와 수도가 함락되어 재봉신국화될 위기에 처했으나...

대공위

이즈와리 마사테루가 솔브렌 북부 협곡[10]에서 솔브렌과 원주민의 협공으로 인해 전사하고 만다. 솔브렌 재정복은 실패하게 되었으며, 지도자를 잃은 원정군은 레흐드 계곡에서 패주하다가 솔브렌 왕국군에 의해 몰살당한다.

대공위 시기는 2163년 1월 14일 이즈와리 마사테루가 세이안-솔브렌렌 전쟁 중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생겨난 국가적 혼란시기로, 이즈와리 가문의 정복 전쟁을 국내외의 환란으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려놓은 시기이다.

이즈와리 마사테루 치세에 완전히 정복될뻔했던 브레니스 왕국은 제국의 혼란으로 인해 가까스로 살아나 프레니처 전 지역을 회복하고, 이즈와리 히토하사 시기부터 이즈와리 마사테루 시기까지 정복되었던 가베 문화권의 봉신국들은 이로 인해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덟 가문과 두 태양

황제가 사라진 세이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참칭하기 위해 2165년부터 2167년간 8가문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던 2년간을 이르는 명칭이다. 2년간의 혼란상 이후 호시마 왕조 권력을 차지하게 되어 황제위를 이어간다.

중흥기

세이안 제국의 중흥기는 치요기 시대와 아카리 시기로 나뉜다.

치요기 시대

치요기를 본가로 하는 호시마 왕조와 호국섭정기, 와카에 왕조의 시기를 치요기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세이안 제국의 수도는 세이안 시[11]에서 치요기[12]로 옮겨졌으며, 제국의 수도가 동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린쿄[13] 지방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호시마 왕조

2163년 창건된 호시마 왕조는 혼란상을 극복하고 지방 영주들을 성공적으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복속 과정에서 광범위한 자치를 허락해 단기간 세수가 감소하게 되었다.

호시마 왕조는 지방 영주들에게 자치권을 주어 지역을 안정시키는 대신, 중상주의적 시장접근과 귀족들을 동원한 작위 확장 전쟁으로 린쿄 지방의 무역 거점지를 상당수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 이 시기 북메디아 서부의 섬들과 거대한 무역항인 제니하마[14]세이안 제국에게 복속된다.

호시마 왕조의 초기에는 자치도로 인해 세수가 매우 낮아 국가의 재정에 무리가 올 정도였으나, 무역적인 발전으로 인해 그 어떤 시기보다 풍요로운 시기라고 평가받는다.

호시마 왕조는 린쿄 지방 너머의 현 나지에셔트 권역에 속한 셀론드 신성공화정을 완전히 제압하여 봉신국화하였으며, 셀론드 신성공화정은 멸망시기까지 세이안 제국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호시마 왕조의 중상주의적 정책은 무역로에서 벗어난 지방귀족세력들의 재정적 위기를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잠넨 고원 근교의 무역로에서 제외된 북부 영주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이들은 북부의 카둔 계통 이민족인 솔니들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지역적 피로도가 쌓인 상태였으며, 무역혜택을 받을 수 없어 재정적인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호시마 왕조는 이들에게 변경 방비를 위한 군사대금만 지원하여 귀족을 포함한 대부분의 계층의 생활 수준이 바닥을 기었으며, 중앙 정부의 지원금과 감사[15]가 들어오는 둔전 제도인 칸페이 제도는 초기의 효율적인 국경방어 능력을 상실한 채, 지방 군벌의 세력화를 가속화시켰다. 북부 지방의 귀족들은 중앙정부에게 강력한 불만을 가졌으나, 그들은 군사통제권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시마 켄(2163~2182)
호시마 사부지로(2199~2223)
호시마 타다유키(2223~2242)
호시마 아키미네(2279~2315)
호시마 요시모토(2368~2406)

2401년, 세이안 제국은 호시마 요시모토의 치세 하에 제국 북부를 위협하던 솔니 부족들을 완전히 복속시켜 봉신국화하였다.

호시마 요시모토 시기부터 세이안어의 굴절화 현상이 시작되며, 현 세이안어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다.

시리카와 엔지로스(2439~2456)
시리카와 카지로스(2456~2487)
호시마 네리타디오스(2487~2523)
호시마 시케나리오스(2559~2569)

호국섭정기

2569년 츠루다바시[16], 시오타니[17], 카가미가사키[18]의 지역귀족들은 황제가 주체하는 회의에 초대받지 못하는 모욕을 겪었고, 이로 인해 변경군을 데리고 치요기로 진격한다. 이 사건을 2569년의 호국난이라고 부른다. 호시마 왕조는 북부 귀족들에 의해 멸문당하였으며, 호시마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호시마 사카기는 거세당한 채 치요기 거리에서 조리돌림당하다 참수되어 사망한다.

2569년부터 2588년까지 19년동안 북부의 귀족중 하나인 우츠노야마 아사무네를 황제 대행인 호국섭정으로 내세웠으며, 이 기간을 호국섭정기라고 칭한다. 호국 섭정은 거대한 파벌이 되어버린 제국 해안도시의 무역상 세력의 수장들을 처형시키고 국가를 위협할 수 있는 상인 세력들을 일시적으로 황제에게 복속시켰다. 이때 복속된 무역상 세력은 29세기까지 제국의 내환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카마티오스의 난으로 인해 제국이 커다란 혼란에 빠지자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을 세워 제국의 직할에서 이탈하게 된다.

와카에 왕조

2588년 치요기를 비롯한 제국의 모든 도시와 영토에서 호국섭정의 치세에 피로감을 느낀 귀족과 백성들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북부 경계지방 귀족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치요기의 주도 세력가문이었던 와카에 가문의 와카에 모토노미온에게 황제관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호국섭정기를 종료하였다. 북부 귀족들은 자신들의 안전한 세력퇴장을 바랬지만 와카에 모토노미온는 황제로 선출되자 마자 19년간 황제권을 위협했던 북부 귀족을 전원 숙청하고 당시 제압된 계층에게 조금의 유화책을 내세워 황권을 강화하였다.

와카에 모토노미온(2588~2610)

와카에 모토노미온은 변경령을 직할로 전환한 이후 셀론드 신성공화정 동부의 베센 지방과 소노르인들을 다시 복속시켰으며, 2599년, 2603년의 2번에 걸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고 소노르인의 저승사자라는 이명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2612년 소노르 북부의 솔브렌 왕국과의 전쟁에서

와카에 요시아케르(2647~2691)

2163년의 대공위 사건으로 인해 제국의 봉신국가에서 벗어난 가베 도시국가 연합은 기르긴 왕국을 세워 세력권을 형성하였으나, 와카에 요시아케르가 2650년에 일으킨 하나타로 해전으로 인해 기르긴 왕조의 해안 도시 전체가 세이안 제국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와카에 사키노보스(2691~2722)

이후, 와카에 사키노보스 시기 2719년 브레니스 왕국을 다시 공격하여 아리카미[19]까지 확장하였으며, 기르긴 왕국의 수도를 다시 정복하여 직할화를 꾀한다.

대공위로 인해 영향력에서 벗어난 솔브렌 왕국을 2786년에 다시 정복하였으며, 솔브렌 북부를 통해 접촉한 아마자쿠라 계통 부족국들[20]에게 복속을 위한 서한을 보내기까지 하며 북메디아 북부의 약 40%를 직할 및 영향권에 넣게 된다.

와카에 츠카시온(2783~2814)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던 와카에 왕조는 지속적인 전쟁비 충당을 위해 삼십이처교 수도원들의 자치를 철폐하여 삼십이처교 사제들의 반발을 샀다. 2800년대 초반 제국을 강타한 츠카시온 역병[21]으로 인해 제국이 내부적으로 곪아들어가며 와카에 왕조의 인기는 날이 갈 수록 떨어졌으며, 세이안인들이 카둔 종족의 쾌락주의적 종교를 일부 받아들여 만들어낸 연속처 이단이 제국 심부에서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와카에 모리모르테(2868~2888)

연속된 전투로 인해 국가는 피로에 빠졌으며, 연속처 이단이 국가의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때로는 염세주의적으로, 때로는 쾌락주의적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설파하는 연속처 이단은 삼십이처교의 각 처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있으며, 윤회 대신 격변을 통해 처가 변화한다고 믿는 삼십이처의 이단으로, 쾌락주의적-영지주의적 성격을 띈 이단이었다. 연속처 이단은 평민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며, 물질적으로 부유한 도시인 오닉서커트를 비록한 해안가 도시에서 그 교세를 키워나갔다. 2860년대에 이르러서는 해안가 도시의 영주들 대부분이 연속처 이단을 따르게 되었고, 2871년 와카에 왕조의 황제인 와카에 모리모르테[22]는 연속처 이단의 사실상 수장인 우라키오 헥사리온[23]을 처형하고 연속처 사제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이들에게 화답하였다.

결국, 와카에 왕조 말기에 세이안 왕국에 내재되어있던 불안이 현실화되어 세이안 역사상 가장 처참한 재해가 되어 찾아오게 된다.

카마티오스의 난

카마티오스의 난은 2888년에 시작되어 2901년에 종료된 오니시다를 중심으로 한 반란으로, 제국 중흥기의 종료를 알린 사건이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국가적 피로가 누적되고, 와카에 왕조시기 남발되었던 특권과 특정 계급에 대한 탄압이 도화선이 되어 제국을 황혼으로 이끈 사건이다.

카마티오스 나기미티오스[24]오니시다[25]의 참주로, 연속처 이단 숙청 시기 멸문의 화를 입은 대상이었다. 그러나, 본래라면 카마티오스 가문으로부터 회수되어야 할 참주 자리는 행정상의 누락으로 카마티오스 나기미티오스에게 돌아갔고, 그는 타테호시[26]의 아사키오스 가문[27] 및 여러 무역도시의 참주들과 손을 잡고 세이안 제국의 군대가 기르긴 왕국솔브렌 왕국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오니시다, 나리하라, 타테호시, 시라나가. 제니하마 등의 무역거점 도시로 확산되었다. 카마티오스의 난은 제국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 참주들은 끝없는 징발로 인해 제국에 대한 불만을 가졌다. - 삼십이처교 교회는 교회 관활권 회수와 연속처교 이단에 대한 회개권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 연속처교 이단들은 자신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 상인들은 전쟁용 상선 징발과 의도적인 상단 간섭 및 무거운 교역세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 평민들은 징병과 이단으로 인한 분노를 가졌다.

이와 같은 불만은 제국 동부인 린쿄에서 두드러졌고, 2888년 8월 10일, 세이안 제국기르긴 왕국의 재정복 전쟁을 벌이던 와중 반란이 시작되었다.

일순간의 제국의 해상교통망 및 무역이 마비되었고, 군사들은 적지에서 퇴각하려 하였으나, 와카에 아리타디오스 시기 무리한 해전으로 해군의 상당수가 징집상선으로 대체당한 덕분에 머나먼 가베땅에서 보급도, 돌아갈 방법도 사라져버렸다. 이에 더해, 세이안 제국의 소식을 들은 봉신국인 소노르인들이 세이안의 통행 요구를 거부하여 세이안 제국군은 퇴각로가 단절된 채 고립되었다.

기르긴 왕국은 같은 가베 계통의 신더 왕국과 손을 잡고 돌아갈 길이 없어진 세이안 군사들을 유린했고, 세이안 제국군의 동방군단 3개 군단이 이 전쟁으로 인해 소멸하여 제국의 방위가 완전히 비어버리는 상황이 된다.

반란을 일으킨 무역도시들은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을 선포하고, 본국에 무역 특혜 및 낮은 세수, 관세 면제를 요구하였으며, 2901년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세이안 제국의 봉신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반란 후기 진압당한 나리하라를 제외한 오니시다, 타테호시, 시라나가. 제니하마세이안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으며, 무역거점도시이자 세이안 제국의 대도시인 동부의 4개 도시를 잃게 되면서 세이안 제국은 전체 세수 중 43%, 무역이익의 72%가 감소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카마티오스의 난은 제국의 중흥기를 꺾고 제국을 쇠락하게 만든 주요 사건이 되었으며, 혼란상을 틈탄 모든 봉신국들의 독립, 해외영토의 소멸로 인해 세이안 제국은 이전과 같은 패권 및 헤게모니를 다시는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제국 말기 시대

와카에 모리모르테는 카마티오스의 난의 책임을 모두 물고 실명형 및 거세를 당한 채 치요기 시에서 추방되었으며, 수도는 세이안 제국의 원 수도였던 세이안 시로 다시 옮겨지게 된다. 이것은 라쿠텐보츠 도시연맹으로 독립하게 된 츠루다바시가 수도와 너무 근접해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은 광대했던 영토를 모두 잃었고, 국력은 완전히 소진되었다. 비어버린 황제 자리는 야이카바[28]를 기원으로 하는 아사히라 왕조의 아사히라 이에토로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헤이지 시대

헤이지 시대는 세이안 시를 수도로 하고, 행정 중심이 헤이지[29]에 집중되어있던 시기를 의미한다. 당시 황제가 머물렀던 헤이지 행궁은 대파랑의 참화를 겪고도 살아남아 현재까지 남아있다.

아사히라 왕조

아사히라[30] 왕조는 2901년에서 2939년까지 세이안 제국을 다스렸던 왕조로, 아사히라 왕조 시기 제국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있어 갖은 외환에 시달렸다. 특히나 북서부 브레니스 왕국의 카둔들이 월경하는 경우가 이전보다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제국의 경계는 프레니처 강 이동으로 축소되었다.

아사히라 왕조의 4대 황제인 아사히라 카자모스[31]는 재위 종료 이후 5대 황제인 아사히라 테라사네스[32]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이후 아들의 두 눈을 뽑았으나, 테라사네스의 충복들에 의해 국가에서 추방되고 브레니스 왕국의 힘을 빌려 무력으로 왕위를 탈취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생포된다. 이후, 아사히라 카자모스는 자신이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두 눈을 뽑힌 채 거세당한 후 헤이지 시 거리에서 조리돌림당하다 죽었다.

아사히라 가문의 치세 하의 정치위기로 국가는 불안정해졌으며, 아사히라의 계승권이 위 사건으로 인해 박탈된 이후 세이안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 아카바니오스 가문의 네마티오스가 황제 자리를 가지게 된다.

아카바니오스 왕조

당시 귀족들과 종교계는 화합하여 멸망하는 국가를 되살려놓고자 하였으며, 아카바니오스 네마티오스[33]를 황제로 뽑게 된다. 아카바니오스 왕조는 2939년부터 이마미엔 쿠데타로 황위가 넘어가는 2998년까지 통치했다.

아카바니오스 네마티오스(2939~2971)

네마티오스 황제는 탁월한 외교술로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을 다시 세이안 제국의 봉신국으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첩보술로 각 도시연합의 요직에 친-세이안 파 인물들을 앉힌 후 봉건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세이안 왕국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을 상대로 직할 시절과 비슷한 양의 세금 및 교역세를 징수할 수 있었으며, 제국은 다시 없을 부유함을 얻게 되었다.

2943년을 맞아 거행된 이 개혁을 네마티오스 개혁이라고 하며, 봉신국에 대한 광범위한 징수 확대 및 카리히테스 제도의 설립, 국경방비와 수도원 군사제 실시를 통해 각 계층의 충성도와 기여를 얻어낼 수 있었다.

아카바니오스 네마티오스 황제는 봉신국의 충성을 받아냈지만, 죽는 순간까지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을 의심했다. 그는 봉신국 세력으로부터 세이안 제국을 보호하기 위한 나리하라-카나호리 장벽을 건축하고 봉신 지구에 직할군관구를 배치한다. 직할군관구는 당시에는 효율적인 봉신국 억제세력이었으나,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손자인 아카바니오스 이체키오스가 이들의 수장인 이마미엔 헬데이오스의 쿠데타로 인해 폐위당하게 된다.

아카바니오스 이사모스(2971~2993)
아카바니오스 이체키오스(2993~2998)

아카바니오스 이체키오스[34]는 즉위한 지 5년만에 이마미엔 헬데이오스의 쿠데타로 인해 폐위된다.

이마미엔 왕조

이마미엔 왕조는 2998년부터 3024년까지 세이안 제국을 다스린 왕조이다.

이마미엔 헬데이오스(2998~3012)

이마미엔 헬데이오스[35]는 쿠데타 당시 나기하라-카나호리의 장벽을 수호하는 직할군을 대거 이끌고 세이안시를 점령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직할군이 이탈, 이마미엔 헬데이오스의 직할군으로 편입, 또는 인명피해가 생기면서 장벽 직할군의 세가 약해졌다. 이마미엔 가문은 아카바니오스 가문이 일으킨 봉신국들과의 관계와 무역로 재구축을 통해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였으나, 쿠데타 당시 기용한 병력이 내부 사정으로 인해 충원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 방비가 취약해졌다.

국가 방위의 헤이로 이어지는 직할군 쿠데타는 당시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였지만, 약 80년 이후 일어나는 시모로쿠 전투에서 방위 지역이 텅텅 비어버리는 참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쇼난 시대

쇼난 시대는 3012년부터 3177년 시모로쿠 전쟁까지, 쇼난구[36]를 행정중심으로 한 시대를 의미한다.

홀로고스 왕조

홀로고스[37] 왕조는 3012년부터 3051년까지 이어진 왕조로, 이마미엔 왕조의 계승권 박탈 이후 들어서게 된 왕조이다. 홀로고스 왕조의 등극은 홀로고스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의 권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3038년 4월 홀로고스 반대 귀족의 쿠데타로 7번에 걸친 전쟁이 일어나 국력이 소진되게 된다.

홀로고스-디메티콘 전쟁

홀로고스-디메티콘 전쟁은 3038년부터 3051년까지 7번에 걸쳐 일어난 전쟁으로, 불안정한 세이안 제국에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디메티콘 왕조

디메티콘[38] 왕조는 3051년부터 3077년까지 이어진 세이안 제국의 왕조로 홀로고스 왕조의 반대파들이 디메티콘 가문을 필두로 세운 왕조이다. 홀로고스-디메티콘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국이 회복되기도 전에 대파랑의 침공으로 인해 세이안 제국은 회생하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라쿠텐보츠 전쟁

홀로고스-디메티콘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완전히 쇠해가던 3169년, 2943년 네마티오스 황제가 재복속시킨 동부 소국들과의 연락이 일시에 끊기게 되었다. 제국은 지속적으로 동부 봉신국들과 가베 해안에 사신을 보냈으나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에 집어삼켜졌다.

약 4년간의 불안한 침묵이 계속된 가운데 불안은 공포가 되어 제국의 동쪽 경계의 형현했다. 그것이 제국 동부 경계에 나타났을 때, 세이안 제국은 주변 국가들이 무엇에 포식당했는 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북메디아의 가장 참혹한 재앙, 대파랑이었다.

파랑 기병대는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을 향하고 있었고, 4년만에 전략적으로 풀려난 서부 왕국의 피난민들은 그 입으로 공포만을 말하고 있었다.

네마티오스 대제 이후 주변 세력과의 외교전으로 발달된 외교술을 보유하고 있던 세이안 제국파랑 기병대에 화친을 바라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의 대답은 단 하나였다.

죽음 혹은 복종

이외의 어떤 외교도 거부한 채 모든 문명의 파멸만을 바라는 파랑 기병대세이안 제국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창 끝을 제국에게로 향하고 있었고, 전쟁은 불가피했다.

3173년, 세이안 제국의 봉신국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카가미가사키 평원에서 제국 및 도시연맹군은 대파랑을 상대하게 된다.

제국의 동부로 파견된 자텐다 황금전쟁 기사단는 이미 셀론드 전역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말했던 공포와는 다르게 제국은 네마티오스의 중흥 이래로 봉신국들의 군사를 가용받는 방식의 히테카리스 제도로 일정 이상의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부유했던[39] 라쿠텐보츠 도시연합의 협조가 있다는 전제 하에 기르긴 왕국신더 왕국, 셀론드 신성공화정을 멸망시킨 이후 공세종날점에 다다른 자텐다 황금전쟁 기사단을 격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예상되었다.

또한 라쿠텐보츠 도시연합대파랑의 전쟁 과정 중 무역로를 통해 파랑 기병대에 대한 정보를 방대하게 수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침묵의 4년간 세이안 제국은 종신국들과 전쟁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11세기 이래로 북메디아의 거대한 제국이었던 세이안 제국의 생존과 화려한 부활은 필연이라 예상되었다. 실제로 3177년까지는 카가미가사키, 야에츠를 제외한 세이안 문명권의 어떤 지역도 대파랑에게 함락되지 않은 채 세이안 제국은 일방적으로 파랑 기병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시모로쿠 전투와 북메디아 서부 전역의 파랑 잠식

시모로쿠 전투는 참극으로 끝났으며, 세이안 제국은 해안가의 일부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파랑 기병대에게 침탈당하게 된다.

황혼기

세이안 제국의 황혼기는 3177년 시모로쿠 전투[40]에서 패배하여 디메티콘 타키할[41]이 실로마리오스 유스타디스 카타미네스[42]에게 붙잡혀 양 눈을 뽑히고 폐위당해 실로마리오스 왕조로 교체당한 이후 멸망까지ㅇ 시기를 의미한다. 실로마리오스 왕조의 치세는 파랑 기병대와 국가 내부의 귀족 세력의 지속적 사보타주로 불안하였으며, 실로마리오스 왕조의 황제들은 멸망해가는 국가를 되살리기 위해 개혁을 일으키지만 번번히 암살당하거나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실로마리오스 왕조

제 13차 세이안 공방전

멸망 및 세이안 왕국의 시작

사트.svg 자세한 내용은 세이안 왕국/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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