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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1일 (화) 22:01 기준 최신판
+ 대정탈환[3] (시슈반란) 大政奪還 (地水叛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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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쟁_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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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_그림_설명}}} | ||
날짜 | ||
5513년 2월 14일 ~ 5513년 8월 2일 | ||
장소 | ||
신세이 왕국 | ||
원인 | ||
아카하나노가쿠(오오나리)측의 개혁정책에 대한 기득권(시슈)의 불만 | ||
교전국 | 오오나리(大震) | 강경 시슈(地水) |
신세이 왕국 | ||
지원 세력 | 개혁파 | 시슈파,하쿠니치파[4],스이레이파[5] |
상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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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5513년 2월 14일, 신세이 왕국 내에서 개혁을 단행하려는 개혁파 하야다테 아카하나노가쿠의 오오나리측이 기득권인 시슈파를 대정내각에서 제외시키자 몇몇 강경파 및 군사책무자가 일으킨 반란으로 오오나리측이 승리하지만 후에 군사력 공백으로 인해 칸-테이 전쟁을 불러온다.
배경
5512년 1월 1일, 신년 기념 축제 후 공개된 2차 아카하나노가쿠 대정내각에서 시슈파를 포함한 여러 기득세력들의 명단이 제외되자 기존 대정내각원이었던 레이류우 호시타카(嶺龍 星高)가 상소를 올렸고 이를 아카하나노가쿠가 "대정내각원 이외의 상소는 금지한다"라며 기각한다. 시슈파 내에서 원로급이었던 레이류우에게 이런 대접을 하자 일부 강경파는 군책무권을 놓지 않다가 아카하나노가쿠의 1차 진압으로 전부 쫓겨난다.
오츠슈 무츠키의 1차 반란
5512년 3월 9일, 남부 츠키미야 제 1군의 전 총책이었던 오츠슈 무츠키가 부하장교인 세이난 카라스를 포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이 반란은 츠키노미야 제 2군에 의해 진압 당하지만 기득권의 반발은 점점 더 거세졌다.
메이노 시로유키의 2차 반란
5512년 7월 21일, 북부 엔아자 제 3군의 전 총책이었던 메이노 시로유키가 전과 동일하게 부하장교인 오오츠마 하쿠센을 포섭해 반란을 일으켰다. 메이노의 반란은 엔자와 지역을 전부 집어삼킬 정도로 거셌지만 이후 키타바야시측의 지원군으로 인해 진압당한다.
이치나이 세이코의 3차 반란
5513년 1월 19일, 서부 히가시야마의 하노(坡鷺)관과 전 그 지역 총책이었던 이치나이 세이코가 반란을 일으켰다. 평소처럼 진압될 것 같던 이 반란은 여러 지역의 시슈파 세력이 가담하며 전국 단위로 퍼져나갔고 아카하나노가쿠가 전쟁을 선포하며 시슈측에서도 대정탈환을 외치며 내전이 시작됐다.
북부의 상황
북부 대부분의 현은 강경 개혁파층이 담당하고 있었지만, 로우신현의 유력세력인 나이우미(內海)관과 시슈가 결탁해 일어났지만 주위 키타바야시,엔아자,무라사키노우미,진포의 군사에 짓밟히고 겨우겨우 중부의 강경 시슈파의 사카탄으로 도주한다.
중부의 상황
사카탄 지역은 매우 강성한 관인 킨가이(近海)관이 시슈와 협력관계를 맺으며 슈케이부와 세이지현과 키타코우현의 군대가 밀리는 형세가 보였다. 하지만, 전쟁 후기에 사카탄에 고립된 군대들은 물자를 수송받을 수 없었고 결국 킨가이 관국의 관주가 항복하며 안정세에 들어갔다.
남동부의 상황
카쿠우에현의 우미노츠노(海之角)관의 관주가 중부세력의 탈출로를 제공해주고 이후 소가이현을 공격하며 남동부의 상황은 심각하게 진행됐다. 이후, 난케이부와 이케도라현이 카쿠우에현과 소가이현을 압박했으나 야나기사무의 오오츠(五鳦)관이 이케도라를 압박하며 중부로의 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남부 이케도라가 먼저 함락되고 이어 북부 이케도라까지 함락되자 오오나리측은 이가타,도케이부측 군대로 증원시키며 막으려 했으나 도케이부의 마츠미즈구까지 침공당하기 시작하며 남부를 내줄 위기에 처했다.하지만 이로도야마,츠키미야의 군대가 전선에 충원되자 형세가 역전됐고, 니시케이(西境)관이 오오나리측으로 변절하며 공세는 더욱 격렬해졌다.다시 카쿠우에 남부까지 밀린 시슈측은 마지막 항전을 위해 서쪽 끝 토도마치(東都町)관으로 도주한다.
남서부의 상황
서부에서 가장 강성한 토도마치관이 오오나리측에 붙으며 라이키와를 순식간에 점령하며 압박했다. 이후 히요케(日曜銘)관까지 합세하며 히가시야마,사이케이부까지 점령해나간다. 하지만 이후 우메마치측 군대에 밀리며 다시 히요케관까지 후퇴해야했다. 게다가 북부군의 원조로 히요케가 함락하며 다시 라이카와에서 항전하는 신세가 된다. 남동부에서 도주해온 우미노츠노관측의 군대를 수용해 항전했지만 결국 5413년 8월 2일 오후 12시에 항복한다.
개혁정강타협
이후 시슈측 원로급인 레이류우 호시타카와 오오나리측 인사이자 대정대신인 로쿠노 마에야 그리고 중재자인 아카하나노가쿠 삼자는 시슈측의 항복을 인정하고 앞으로 신세이에 적용될 개혁정강을 타협하며 사실상, 시슈파는 해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