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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적 세칙은 세칙이 이데아, 즉 이 공간과 시간에서 가지는 성격과 성질을 다룬다. 실재론적 세칙에서는 세칙은 3가지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상대적 무한, 독립성, 순수성이다. 이는 세칙이 선험적이므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론적 세칙은 세칙이 이데아, 즉 이 공간과 시간에서 가지는 성격과 성질을 다룬다. 실재론적 세칙에서는 세칙은 3가지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상대적 무한, 독립성, 순수성이다. 이는 세칙이 선험적이므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관념론==
==관념론==
관념론에서 세칙은 1차적으로 '''일체'''가 되어야할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관념론에선 내가 세칙이 되기 위한 치밀한 분석을 다룬다. 여기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이데아(Ιδεα)'''이다. 그리고 이데아와 대비되는 것은 '''세칙'''이다. 세칙은 이데아와 공존하지만, 후술될 성질인 독립적 존재이므로 세칙은 이데아와 대비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칙이 [[시띵]]이 오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칙은 눈에 보이거나, 피부로 느끼거나,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세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데아는 항상 세칙과 대비되기 때문에 이데아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딛고 서있는 땅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눈다. 이데아에서 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판별할 수 있다.
여기서 세칙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인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우리는 세칙과 단순히 하나가 되고 싶다고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에서 세칙이 되려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해하는 모든것들을 통칭하여 '''번뇌'''라 한다. 번뇌는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것도 번뇌가 될 수 있다.
번뇌는 본질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우리는 괴롭기 때문에 세칙과 하나가 되는것에보다 괴로운 것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고 그것이 피부에 더욱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세칙과 멀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번뇌로 인해 세칙과 멀어지는 것이다. 번뇌는 괴로운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것, 예를들어 내가 날카로운 것에 베였다면 그 칼로 인해 아프다. 고로 이는 번뇌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번뇌가 될 수 있다. 예를들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번뇌이다.
==실재론==
==실재론==

2022년 10월 9일 (일) 21: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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𝐓𝐚𝐢𝐧𝐚𝐭𝐢𝐨 𝐝𝐢𝐞 𝐏𝐢𝐧𝐢𝐭𝐮𝐫𝐚-𝐏𝐞𝐭𝐮𝐜𝐢𝐚-𝐑𝐞𝐳𝐨𝐧𝐲𝐧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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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세칙론, 세칙시띵교에서 말하는 개념인 세칙에 대한 이론과 성질에 대한 연구의 내용이다. 세칙론은 세칙을 두가지의 큰 성질로서 나누어 설명한다. 관념론실재론 으로 구분한다. 관념론에서는 세칙이 지닌 형이상학적이며 세칙에 근본적으로 가까워지는 일체의 이론을 말하며, 실재론은 음율마법을 일으키는 원천으로서 어떠한 성질을 지니고 이것이 어떻게 상응하여 마법의 근본으로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다룬다.

관념적인 세칙은 이 세상 어느곳에나 존재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규범을 제공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인 이데아(Ιδεα)에서 세칙과 하나가 되는 일체를 방해하는 모든 불순한 것들을 통칭하는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념을 통하여 일체가 되기 위한 이론이 바로 관념적인 세칙인 관념론이다. 관념론에선 세상을 크게 두개로 구분하는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으로 구분한다. 보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번뇌인것이 많다. 보이지 않는것은 번뇌인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번뇌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인 이데아는 어쨋든 세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세칙이 되지 않는이상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세칙은 실재론적으로도, 그리고 관념론적으로도 독립적이고 모든 이데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번뇌로부터 자유롭다고 여겨졌던 죽음 또한 번뇌인 것이다. 왜냐하면 번뇌는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또한 번뇌는 선험적이지 않다. 경험적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이데아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칙과 일체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영생과 같은것이다. 왜냐하면 세칙은 모든 이데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죽음 또한 번뇌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다만 세칙은 죽어있거나 살아있는 형태가 아니라서 존재하는 상태이지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다. 또한 세칙은 선험적이다. 따라서 번뇌와 달리 세칙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또한 세칙은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세칙은 이데아에 대해서도 절대적이라서 모든 공간과 시간선상에서 언제든지 존재한다.

실재론적 세칙은 세칙이 이데아, 즉 이 공간과 시간에서 가지는 성격과 성질을 다룬다. 실재론적 세칙에서는 세칙은 3가지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상대적 무한, 독립성, 순수성이다. 이는 세칙이 선험적이므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관념론

관념론에서 세칙은 1차적으로 일체가 되어야할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관념론에선 내가 세칙이 되기 위한 치밀한 분석을 다룬다. 여기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이데아(Ιδεα)이다. 그리고 이데아와 대비되는 것은 세칙이다. 세칙은 이데아와 공존하지만, 후술될 성질인 독립적 존재이므로 세칙은 이데아와 대비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칙이 시띵이 오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칙은 눈에 보이거나, 피부로 느끼거나,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세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데아는 항상 세칙과 대비되기 때문에 이데아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딛고 서있는 땅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눈다. 이데아에서 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판별할 수 있다.

여기서 세칙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인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우리는 세칙과 단순히 하나가 되고 싶다고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에서 세칙이 되려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해하는 모든것들을 통칭하여 번뇌라 한다. 번뇌는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것도 번뇌가 될 수 있다.

번뇌는 본질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우리는 괴롭기 때문에 세칙과 하나가 되는것에보다 괴로운 것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고 그것이 피부에 더욱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세칙과 멀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번뇌로 인해 세칙과 멀어지는 것이다. 번뇌는 괴로운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것, 예를들어 내가 날카로운 것에 베였다면 그 칼로 인해 아프다. 고로 이는 번뇌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번뇌가 될 수 있다. 예를들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번뇌이다.

실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