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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투라-페투치아-레조넌스 제국
𝐓𝐚𝐢𝐧𝐚𝐭𝐢𝐨 𝐝𝐢𝐞 𝐏𝐢𝐧𝐢𝐭𝐮𝐫𝐚-𝐏𝐞𝐭𝐮𝐜𝐢𝐚-𝐑𝐞𝐳𝐨𝐧𝐲𝐧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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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세칙은, 이 세상이 태초에 생겨날 때부터 존재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는 진리이다. 이 세칙은 그 누구도 모를 때부터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분명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띵 이전에는 아무도 세칙의 존재를 느끼거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띵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과정에서 세칙을 터득하였으며, 수련을 통하여 자신을 세칙과 하나에 가깝게 만드는 방법을 생전에 완성하였다. 삶의 막바지에서 세칙과 하나가 되는 것만을 남겨둔 시띵은, 이 혼란한 세상에 남게 될 이들이 진리를 터득하여 더욱 슬기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으므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전수하였다.

비로소 시띵로토시아에서 세칙과 근본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하늘의 문이 열려 시띵은 승천하였으며, 제자들은 시띵의 뜻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그 진리를 두고 세칙이라 칭하였다.

 
시띵의 일생

세칙론, 세칙시띵교에서 말하는 개념인 세칙에 대한 이론과 성질에 대한 연구의 내용이다. 세칙론은 세칙을 두가지의 큰 성질로서 나누어 설명한다. 관념론실재론 으로 구분한다. 관념론에서는 세칙이 지닌 형이상학적이며 세칙에 근본적으로 가까워지는 일체의 이론을 말하며, 실재론은 음율마법을 일으키는 원천으로서 어떠한 성질을 지니고 이것이 어떻게 상응하여 마법의 근본으로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다룬다.

관념적인 세칙은 이 세상 어느곳에나 존재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규범을 제공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인 이데아(Ιδεα)에서 세칙과 하나가 되는 일체를 방해하는 모든 불순한 것들을 통칭하는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념을 통하여 일체가 되기 위한 이론이 바로 관념적인 세칙인 관념론이다. 관념론에선 세상을 크게 두개로 구분하는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으로 구분한다. 보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번뇌인것이 많다. 보이지 않는것은 번뇌인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번뇌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인 이데아는 어쨋든 세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세칙이 되지 않는이상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세칙은 실재론적으로도, 그리고 관념론적으로도 독립적이고 모든 이데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번뇌로부터 자유롭다고 여겨졌던 죽음 또한 번뇌인 것이다. 왜냐하면 번뇌는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또한 번뇌는 선험적이지 않다. 경험적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이데아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칙과 일체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영생과 같은것이다. 왜냐하면 세칙은 모든 이데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죽음 또한 번뇌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다만 세칙은 죽어있거나 살아있는 형태가 아니라서 존재하는 상태이지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다. 또한 세칙은 선험적이다. 따라서 번뇌와 달리 세칙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또한 세칙은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세칙은 이데아에 대해서도 절대적이라서 모든 공간과 시간선상에서 언제든지 존재한다.

실재론적 세칙은 세칙이 이데아, 즉 이 공간과 시간에서 가지는 성격과 성질을 다룬다. 실재론적 세칙에서는 세칙은 5가지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상대적 무한, 독립성, 순수성, 시공간상의 절대성, 일체성 이다. 이는 세칙이 선험적이므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관념론

관념론에서 세칙은 1차적으로 일체가 되어야할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관념론에선 내가 세칙이 되기 위한 치밀한 분석을 다룬다. 여기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이데아(Ιδεα)이다. 그리고 이데아와 대비되는 것은 세칙이다. 세칙은 이데아와 공존하지만, 후술될 성질인 독립적 존재이므로 세칙은 이데아와 대비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칙이 시띵이 오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칙은 눈에 보이거나, 피부로 느끼거나,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세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데아는 항상 세칙과 대비되기 때문에 이데아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딛고 서있는 땅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눈다. 이데아에서 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판별할 수 있다.

여기서 세칙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인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우리는 세칙과 단순히 하나가 되고 싶다고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에서 세칙이 되려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해하는 모든것들을 통칭하여 번뇌라 한다. 번뇌는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것도 번뇌가 될 수 있다.

번뇌는 본질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우리는 괴롭기 때문에 세칙과 하나가 되는것에보다 괴로운 것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고 그것이 피부에 더욱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세칙과 멀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번뇌로 인해 세칙과 멀어지는 것이다. 번뇌는 괴로운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것, 예를들어 내가 날카로운 것에 베였다면 그 칼로 인해 아프다. 고로 이는 번뇌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번뇌가 될 수 있다. 예를들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번뇌이다.

번뇌의 성격은 후험적이라는 것이다. 번뇌는 원초부터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지함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인지하지 못한다면 번뇌란 없는것이다. 하지만 번뇌는 곧 괴로운 것이므로 생존함으로서 얻게되는 괴로움이란 필연적이기에 번뇌는 모든 살아있고 인지하는 존재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많은 번뇌를 가지게 되므로 시띵이 오기 이전까지 번뇌로 인해 세칙을 깨닳는 자는 없었던 것이다.

번뇌는 살아있는것, 존재하는 것 모든것에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번뇌에서 자유로울려면 결국 세칙과 일체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다. 죽음은 도피가 아니라 번뇌

따라서, 이러한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무념을 단련해야 한다. 무념이란 번뇌를 밀어내는 속성으로 괴로움을 잊는 것이다. 여기서 괴로움 뿐만 아니라 모든 번뇌를 뿌리치기 위해 무념을 단련한다. 무념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 착각할 수 있으나 정확히는 번뇌를 잊고 세칙이 있음을 아는 행위이다. 무념은 세칙을 알기위해 하는 행동이며 무념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세칙과 더욱 가까워진다. 이것이 자신과 세칙이 온전히 같아지는 순간에는 보이는 세상인 이데아에서 사라지는데 그것을 승천이라 한다.

이를 실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스스로가 공명상태가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세칙과 공명하는 부분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승천한 상태에서는 살아있거나 죽어있는게 아니라 존재한다고 본다. 즉 살아있거나 죽어있다는 보이지 않는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것이다.

실재론

실재론은 세칙이 실재함을 인지하고, 이것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관념론에서 파생된 학문이며 실재론에서 검증한 성질은 관념론에서도 인용되므로 상호보완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실재론은 세칙의 본질적인 성질을 탐구하는데, 여기서 5가지의 세칙의 아주 기본적인 성질을 우리는 알 수 있다.

  • 상대적 무한

세칙은 상대적으로 무한하다. 무슨 소리냐면 세칙은 아주 거대한 이데아에서 독립적인 존재인데 이것 자체는 지금의 세상인 이데아에 비해선 매우 거대하여 무한한 수준인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무한과는 다르다. 세칙이 사실상 무한하지만 우리가 끌어와 쓸 수 있는 세칙의 양이 무한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완전히 절대적 무한인것인지는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적 무한은 음율마법에서 공명상태를 성립시킬때 세칙을 에너지로서 끌어오는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데아에 비해)상대적으로 무한한 세칙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실존한다면 분명 질량, 혹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그 에너지를 인지하고 그것을 끌어올 수 있다면 그 세칙의 에너지를 끌어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칙은 무한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지만 이데아와 별개로 존재하는 독립적 존재이므로 공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칙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독립성

세칙은 이데아로부터 자유로우며, 독립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세칙은 이데아와 섞이지 않는다. 더불어 세칙에 어떠한 공명이나 변수를 둔다고 하더라도 세칙은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칙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이며 음율마법을 통해 세칙과 대응될 수 없다면 세칙은 폐쇄적인 상태가 되는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 순수성

세칙은 순수하다. 세칙은 다른 변수에 의하여 그 본질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며 이데아로부터 독립적인것과는 별개로 세칙에 대해서 어떠한 변수를 가하더라도 세칙은 언제나 온전히 순수하다. 이것은 번뇌가 세칙에 대해서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더라도 세칙은 그 자체로 순수하며 독립적이기 때문에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순수성으로 인해서 공명론에서 말하는 상쇄공명이나 보강공명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상쇄공명 상태는 세칙에 완전히 알맞는 파동을 대응시키는 것이고, 보강공명 상태에서는 세칙 그 자체의 성질이 변하지 않으므로 부분적인 공명상태가 이어저 완전한 공명상태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시공간상의 절대성

시공간상의 절대성은 이 세칙이 이 세상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소리이다. 즉 공간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데아에 한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칙은 존재하지만 어딘가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명상태는 모든 공간과 시간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론상으론 사트 밖에서도 공명상태가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 일체성

세칙은 일체성을 지닌다. 세칙은 무한하므로 이데아에 있는것이 무념이 경지에 다달아서 세칙을 완전히 깨닳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그는 승천하고, 승천하는 것은 곧 세칙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무아일체의 상태가 된것, 즉 존재가 공명상태가 된것이기 때문에 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의식을 가진 존재뿐만 아니라 사물도 그것이 만약 번뇌로부터 자유롭다면 그것은 일체가 될 수 있다. 다만 일체가 가능한것은 무념을 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존재뿐이기 때문에 일체성은 의식을 가지고 세칙이 있음을 아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성질이다.